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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조효제의 인권 오디세이] 사회학으로 인권을 봐야 할 이유

등록 2019-11-19 18:04수정 2019-11-20 02:37

영화 <82년생 김지영>이 평점 테러를 당했다고 한다. 같은 영화를 두고 여남 관객들 사이에 이렇게 호오가 갈리다니. 조국 사태를 놓고 86세대와 청년들 사이의 골이 깊어졌다는 분석도 많다. 전통 인권과 첨단 인권에 대한 사람들의 반응도 크게 나뉜다.

이런 현상을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 어떤 사안을 놓고 찬반이 확연하게 갈릴 때 우리는 다음과 같은 질문을 해봐야 한다. 논쟁의 구도가 제대로 설정되었는가. 잘잘못만 따지는 논쟁인가 전체 맥락까지 보는 논쟁인가. 현재 이야기만 하는가 역사적인 차원도 말하는가. 한국 사회만의 문제인가 전지구적 자본주의 체제에서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문제인가.

이런 점을 파악하려면 사회(과)학적 시각이 필수다. 사람들이 내놓는 비전들 사이의 결정적 차이를 판별할 수 있기 때문이고, 죽느냐 사느냐를 다투는 문제일 수도 있기 때문이다. 한가한 소리로 들리는가. 예를 들어보자.

<누가 왜 기후변화를 부정하는가>라는 책으로 한국에 잘 알려진 기후학자 마이클 만 교수가 최근에 인터뷰를 했다. 기후위기를 부인하는 입장이 진화하고 있다고 주장했다. 과거처럼 기후변화가 없다는 식의 완강한 부인은 이제 거의 없어졌지만 훨씬 더 미묘하고 ‘설득력’ 있는 부인이 등장했다고 한다.

이런 식의 부인은 음식이나 교통수단의 선택, 에너지 절약 등 개인의 행동 변화에 초점을 맞춰 메시지를 전달하곤 한다. 이렇게 되면 문제가 많다. “그런 것은 일종의 회피 전략이기 때문이다. 선의의 사람들이 이런 함정에 빠지곤 한다.”

만 교수가 개인의 행동 변화를 반대하는 것은 절대 아니다. 개개인의 변화는 기후위기의 대응에 매우 중요하다. 그러나 개인의 행동 변화는 거시적 정책 변화에 ‘더하여’ 이루어져야 진정한 의미가 있다. 개인 변화가 정책 변화를 대체하기는 어렵다. 정치적으로 각성한 유권자, 화석연료 산업에 분노하는 시민, 환경윤리를 지키는 개인이 합해져야 한다.

기후위기 대처가 개인의 생활양식 변화에만 치우치게 되면 두가지 결정적 폐해가 생긴다. 개인적 선택과 미시적 올바름을 강조할수록 기후위기를 염려하는 ‘착한 사람들’ 사이에서 누가 더 옳으냐를 두고 설전이 벌어지기 쉽다. 또한 그런 식의 논쟁 때문에 정작 더 큰 문제인 석유, 발전 등 온실가스 발생을 규제해야 할 정치·정책적 압력이 분산된다.

“개인 변화를 강조하는 입장은 일종의 연성적 부인에 해당되고 그것은 여러 면에서 과거의 흑백식 부인보다 훨씬 치명적이다.” 마이클 만은 자연과학자지만 사회학적 관점을 아주 잘 이해하는 것 같다. 상당수 인권 논쟁도 기후위기 대응 비슷하게 개인 행동에 초점을 맞춰 벌어지곤 한다.

사회학적으로 인권을 볼 줄 아는 안목이 그래서 중요하다. 인권 문제를 권력의 원근법으로 파악할 수 있고, 핵심적인 문제와 부수적인 문제를 가릴 수 있으며, 인권을 총체적이고 전지구적이고 역사적인 관점에서 이해할 수 있게 해준다.

첫째, 어떤 인권 문제가 왜 발생하게 되는지를 알 수 있다. 어떤 사회적 고통이 생기더라도 그것이 즉각 인권의 레이더에 잡히지는 않으며, 인권의 레이더에 잡히더라도 즉각 공적인 의제가 되지도 않는다. 시대적, 정치적, 경제적, 사회적으로 어떤 조건이 형성되어야 어떤 고통이 인권 문제라고 비로소 논쟁의 대상이 된다. 즉 사회적 고통은 역사 변화의 산물이라고 할 수 있다.

예를 들어 산업혁명으로 도시 노동자라는 완전히 새로운 계층이 탄생하기 전에는 노동권이라는 개념 자체가 만들어지기 어려웠다. 선거제도가 도입되기 전에는 투표권을 행사하기 위한 참정권 운동 자체가 금시초문인 것이었다.

둘째, 수많은 사회적 고통이 있는데 왜 어떤 문제는 인권으로 인정되거나 정책적 해결이 되는 데 반해, 왜 어떤 문제는 풀리기가 그렇게 어려운지를 설명할 수 있게 해준다. 고통받는 당사자, 인권운동단체, 인권 옹호가들이 어떻게 자원을 동원하면 될지, 어떤 식으로 프레임을 짜면 효과적일지, 인권을 원하는 쪽과 그것에 반대하는 쪽이 어떻게 대결, 타협, 합의하는지를 입체적으로 파악할 수 있게 해준다.

셋째, 사회학은 어떤 인권 문제가 어떤 입법이나 정책의 형태로 ‘해결’되었을 때 당사자들에게 유의미한 권력관계 변화가 왔는지를 평가할 수 있는 기준과 도구를 제공해준다. 어떤 피해자들에게 유리한 변화가 왔다 해도 그것이 미처 예상치 못했던 부작용을 낳거나 의도치 않게 누락된 대상이 나타나기도 한다.

사회적 고통이 나타나고 그것을 권리의 이름으로 요구하여 마침내 그것이 해결되었는가 싶었는데 또 다른 억압권력이 새로운 고통을 발생시키는 끊임없는 과정, 그것이 인권 역사의 영속적인 유형이다.

마지막으로, 사회학은 인권 감수성에 두 종류가 있음을 가르쳐준다. 당대의 불의한 현실에 대한 인권 감수성과 역사적 인권 발전에 대한 감수성이 그것이다. 시대별로 사람들이 유독 민감하게 느끼는 사회적 고통이 있다. 그것이 당대의 인권 감수성이다.

국왕의 자의적인 권력남용에 질렸던 시대에는 ‘법의 지배’만 확립되어도 정말 좋은 세상이 올 것이라고 믿었다. 모든 책을 검열하던 시대에는 ‘출판의 자유’만 보장되어도 숨 쉬고 살겠다고 믿었다. 30여년 전 유월항쟁 때에는 ‘고문 없는 세상’과 ‘대통령 직선제’ 요구가 무척 많이 등장했다. 그것만 이루어지면 편한 세상이 올 줄 알았다.

그런데 시대별로 특유한 억압권력에 의해 인권 문제가 나타난다 하더라도 그 시대에 그 문제만 있다는 뜻은 아니다. 여러 문제가 존재하거나 잠복한 가운데 어떤 문제가 유난히 도드라지게 나타날 뿐이다.

이것을 인권 열차에 비유해보자. 인권 열차의 기관차와 각 차량은 각각의 인권 문제를 상징한다. 기관차에도 엔진이 있고 각 차량에도 엔진이 있다. 앞에서 끌고 뒤에서도 밀어주어야 움직이는 열차다. 시대별로 기관차의 선도 구실을 하는 인권이 달라진다. 예전에 ‘법의 지배’가 인권 열차의 기관차였다면 오늘날에는 ‘페미니즘’이 기관차가 되었다. 앞으로 시대가 바뀌면 또 다른 이슈가 기관차가 되어 인권 아이콘 구실을 할 것이다. 이런 점을 볼 줄 아는 눈이 인권의 역사적 감수성이다.

젊은 세대는 아무래도 눈앞의 문제에 민감한 당대적 감수성을 갖기 쉽다. 반면 기성세대는 경험에 근거한 역사적 감수성이 있다. 서로가 상대를 알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기성세대는 젊은 세대의 당대적 감수성이 없으면 인권이 새롭게 확장, 발전할 수 없다는 점을 인정해야 한다. 젊은 세대는 자신의 당대적 감수성과 분노가 역사적 인권 발전이 축적된 덕분에, 그 토대 위에서 표출될 수 있음을 깨달아야 한다. 사회학적 시각을 갖추면 자기 자신과 자기 세대의 인식적 특성조차 객관적으로 볼 수 있게 된다.

나는 여성이든 남성이든, 젊은 세대든 86세대든, 고정관념이나 자기류의 확신을 넘어, 좀 더 사회학적인 시각으로 사회의 변화를 파악하면 좋겠다. 자칫 피상적인 논쟁에 빠지면 그것이 겉으로 아무리 치열해 보여도 막대한 기회비용을 발생시키면서 인권과 사회의 진정한 진보를 늦추기 때문이다.

조효제 ㅣ 성공회대 교수·한국인권학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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