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선영의 미디어전망대]
지미 새빌과 빨간 마후라. 지난주 <교육방송>(EBS)의 어린이 프로그램 사태를 보며 두 사건이 떠올랐다. 영국 공영방송 <비비시>(BBC)에서 수십년 동안 가요 프로그램과 어린이 프로그램을 진행했던 지미 새빌은 여성 출연자, 여성 스태프는 물론 봉사 활동을 펼친 병원의 소아 환자까지 450여명을 성추행한 악마였다. 미성년 피해자가 70%를 넘었다. 2011년 그의 사망 직후 피해자 폭로가 이어졌고, 생방송 중에 여성 출연자에게 몹쓸 짓을 했다는 제보도 나왔다. 놀라운 건 피해자가 당하는 영상을 유튜브에서 볼 수 있다는 사실이다. 피해자 모자이크도 없다. 그가 나쁜 짓을 멈추지 않자 카메라를 황급히 얼굴 쪽으로 트는 영상 클립도 있다. 비비시 제작진은 공공연한 그의 만행을 알고서도 침묵했던 것이다.
1997년 우리 사회를 들끓게 했던 소위 ‘빨간 마후라’ 사건은 방송 뉴스로 유명해졌다. 가족 시청 시간대에 알권리를 충족할 뉴스도 아니었고, 모방 범죄나 불법 동영상을 찾는 이가 늘지 않을까 우려할 정도로 내용이 선정적이었다. 당시 교육방송의 청소년 미디어교육 프로그램 <미디어가 보인다>를 기획 연출했던 나는 피디로서 이 사건을 최초 보도한 방송사 쪽에 인터뷰를 요청했다. <문화방송>(MBC)의 <뉴스데스크> 진행자를 만날 수 있었고 방송 뉴스로 적절했는지 물었다. 오래전이지만 “내 아이에게는 보여줄 수 없는 뉴스”라 했던 그의 말은 또렷이 기억난다. 설마 하는 마음으로 뉴스를 찾아보았다. 놀랍게도 방송사 사이트에 뉴스 영상이 남아 있었다. 경찰에 체포되어 가해자 사이에서 흐느껴 우는 피해 여학생에게 유도 질문을 한 기자, 맨살이 드러난 피해자 다리를 클로즈업한 카메라. 모두 나빴다. 피해자 동의 없이 유통된 명백한 디지털 성범죄였으나 인권은 없었다. 22년간 온라인에서 유린당하고 있는 열다섯살 피해자의 눈물을 그치게 할 순 없을까. 관련 영상이 즉시 삭제되기를 바란다.
피해자가 당한 영상 복제물이 인터넷에 돌아다닌다는 점에서 위 두 사건은 유사하다. 문제가 된 교육방송 어린이 프로그램 사건도 마찬가지다. 이미 유튜브에 피해자 섬네일(미리 보기 사진)과 성희롱 자막이 달린 복제 영상이 여럿 올라와 있다. 방송사는 복제물 유통의 심각성을 알고 대책을 마련해주시라. 사후 조치가 끈질기게 이루어지지 않으면 피해자인 출연자는 물론 시청자의 상처도 아물기 힘들다.
방송 프로그램도 이토록 관리가 어려운데 개인의 불법 촬영물은 오죽하랴. 피해자 개인이 일일이 영상을 삭제해야 하고, 지워도 사라지지 않는다. 고통을 참지 못해 극단적 선택을 한 피해자의 영상은 심지어 ‘유작’이 되어 인터넷을 떠돌기도 한다. 타인의 고통과 불행을 즐기는 영상 소비 행위가 개탄스럽다. 지난달 경찰청, 방송통신심의위원회, 방송통신위원회, 여성가족부 등 4개 기관은 디지털 성범죄 공동대응을 위한 업무협약을 맺고 불법 촬영물 신고를 연계 처리한다고 밝혔다. ‘공공 디엔에이(DNA: Data, Network, AI)’ 데이터베이스로 피해자 보호와 구제의 신속성을 높이고 처벌을 강화한다는 것이다. 서울시도 최근 디지털 성범죄 피해자 통합지원센터 ‘온 서울 세이프’를 열었다. 그러나 정부와 기관이 애를 쓴다 해도 불법 영상 소비자가 존재하는 한 역부족일 것이다. 새해에는 부디 불법 영상 소비 자체가 사라져 이 대책들이 쓸모없어졌다는 뉴스가 들려오면 좋겠다.
최선영 ㅣ 이화여대 에코크리에이티브협동과정 특임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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