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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시민편집인의 눈] 민식이법 그 이후 / 홍성수

등록 2019-12-19 18:29수정 2019-12-20 02:35

홍성수 ㅣ 숙명여대 법학부 교수

결국 민식이법이 통과되었다. 법은 곧 시행되겠지만 곱씹어볼 대목이 많다. 민식이법 논의가 본격화되자 소셜 미디어와 인터넷 게시판에 이 법의 문제점을 지적하는 글이 줄을 이었다. “사망사고가 나면 규정속도를 지켰어도 무조건 감옥 간다.” “실수 한 번에 무기징역형을 받는다.” “엄벌 위주의 대책만 포함된 악법이다.” 여러 언론이 재빠르게 팩트체크에 나섰다. 법의 내용과 입법취지를 알기 쉽게 짚어주는 기사들이 쏟아져 나오자 그간의 오해가 빠른 속도로 해소되기 시작했다. 민식이법에 가해자 가중처벌만 담긴 것이 아니고 나름의 예방대책이 포함되어 있다는 사실이 널리 알려졌고, 처벌 가능성에 대한 과도한 우려도 잠잠해졌다. 언론이 보기 좋게 제 역할을 한 셈이다.

하지만 입법 과정을 되돌아볼 필요가 있었다. 문재인 대통령 지시로 입법 논의가 급속도로 진행되었는데, 그 과정에서 충분한 숙의가 있었는지 의심되는 대목이 있었기 때문이다. 이때 한 언론사가 이 법의 법안 발의부터 최종 통과까지 두달간의 입법 과정을 검토한 연재 기사를 내놓았다. 상임위 논의부터 본회의 표결까지 단계 단계마다 드러난 문제들을 날카롭게 지적했고, 찬성한 의원과 반대한 의원의 입장도 충실히 소개했다. 진영 대결 양상이 벌어지면서 놓쳐버린 쟁점들, 법안 내용도 잘 모르고 표결을 강행했던 의원들의 사연 등이 낱낱이 드러났다. 어쩌다가 나온 기사가 아니다. 이 언론사는 평소 국회 관련 기사를 충실하게 써내는 것으로 정평이 났었고, 민식이법 입법 과정에 대해서도 실력을 발휘했던 것이다.

그럼에도 언론이 충분히 다루지 못한 문제들이 있다. 예전보다는 나아졌다고 하지만, 교통사고 사망률, 특히 보행자 교통사고 사망률은 여전히 높은 수준이고, 특히 어린이 보행자 사망률은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평균의 1.8배에 이른다고 한다. 강도 높은 대책을 세우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그런데 민식이법은 어린이보호구역에서 13살 미만 어린이의 보호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 그동안 전국 곳곳에서 간선도로와 이면도로에서 제한속도를 줄이는 방안이 계속 추진되어 왔고, 보행자의 안전을 위한 다양한 조치들이 있었다. 그렇게 전반적으로 교통안전체계를 강화하려는 시도가 지속적으로 추진되어 왔는데, 그 가운데 민식이법이 그런 대책들과 어떻게 맞물릴 수 있는 것인지 궁금했다. 보행자 사망자의 70% 이상이 인도와 차도가 분리되지 않은 도로에서 발생한다는데, 이 문제가 더 근본적인 문제 아닐까? 한국에서 노인 보행자 사망률이 오이시디 평균의 5배라는데, 어린이뿐만 아니라 보행자의 안전을 전반적으로 보장할 수 있는 대책이 함께 검토되었어야 하는 게 아닐까? 게다가 어린이들은 어린이보호구역에서만 다니는 것이 아니지 않은가?

민식이법에 폐회로텔레비전(CCTV)과 신호등 설치 등 나름의 ‘예방’ 대책이 마련되어 있기는 하지만, 어린이보호구역에서 운전자의 시야를 가리는 불법주차 문제 등 다른 예방대책들도 폭넓게 논의될 필요가 있어 보였다. 민식이법이 없어도 사고를 낸 운전자는 처벌된다. 굳이 새로운 입법을 통해 ‘가중’ 처벌을 해야 한다면, 그 이유가 충분해야 한다. 운전자의 주의의무를 강화하는 각종 예방대책으로는 부족했을까? 시시티브이로 안전속도 등 운전자의 의무 위반 행위를 철저히 단속하는 것만으로는 사고를 충분히 예방할 수 없었을까? 다양한 방법을 시뮬레이션해보고 가장 효율적이고 효과적인 방법들을 정교하게 배치해야 하지 않았을까? 그동안 한국의 정책 성안이나 입법 과정을 보면, 근본적인 원인을 두루 살펴 최적화된 대안을 내놓기보다는 당장의 가시적인 효과에만 집중하는 경우가 많았다. 민식이법을 만드는 과정에서도 그런 문제가 없었는지 되돌아볼 필요가 있다. 한국 입법 과정의 총체적인 문제점을 돌아볼 수 있는 기회이기도 하다.

민식이법은 시민들의 정당한 문제제기가 입법으로 이어진 성과로서 큰 의미를 갖는다. 하지만 최적의 입법정책으로 귀결되기 위해서는 다양한 각도에서 매서운 감시와 비판이 필요하다. 그것은 전문가의 몫일 수도 있지만, 여론을 수준 높은 공론으로 재탄생시키는 것은 언론의 몫이다. 제구실을 한 부분도 있었고 아쉬움도 있었다. 아직 끝나지 않았다. 민식이법 제정 과정을 복기해볼 때다. 입법 이후 보완돼야 할 과제를 점검해야 하고, 더 나아가 입법 현실을 근본적으로 개선하기 위해 무엇이 필요한지 되짚어봐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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