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태호 경제부 기자
아침햇발
“뭐, 00이가 합격했다고! ….”
2005년 겨울, 덩치 큰 사내 하나, 어울리지 않게 눈물을 보인다.
1986년 겨울, 대학교 1학년생 하나, 도서관으로 타박타박 걸어간다. 어제 고향에서 올라와 오늘부터 사법시험 준비에 들어가려 한다. 2학년 형을 길에서 만난다. 싸우러 가잔다. “전두환 독재정권의 마지막 발악이다. 삼민투 위원장이 구속됐다. 가열찬 투쟁을 전개할 때다!” 선배 목소리가 커지자 겁도 커진다. 그러나 가야 한다는 의무감에 따라 나선다.
경찰에 붙잡혀 구속됐다. 그때 그는 ‘운동’의 길에 들어섰다. 밝힐 수 없는 아픔이 함께했다. 대학 졸업 뒤 덩그러니 남아 뒤늦게 사법시험에 다시 나섰고, 이제 마흔이 다 됐다.
그때 최루탄 연기 뽀얗던 관악산 철망 앞에서, “학우 여러분, 싸웁시다!”라고 외치던 2학년도 붙잡혔다. 구속됐고, 집행유예 뒤 군에 끌려갔다. 지금 보험회사 직원이다.
지난 연말, 십수년 만에 이들이 만났다. 2학년이 1학년의 합격소식을 들은 며칠 뒤였다. 83~87학번들. 대학 교직원, 보험회사 직원, 시인, 유기농 공동체 직원, 공무원, 기자, 인터넷회사 사장.
형은 거기서도 자꾸 눈물을 질금거린다. “10여년 간 네가 늘 떠나지 않았다. 다른 놈들은 어떻게든 자리잡고 사는데 ….” 늦가을엔 늘 합격자 명단에서 연락 끊긴 그 이름을 더듬었단다.
그날 밤, ‘광야에서’를 만주벌판 아닌, 방구석에서 목놓아 불렀다. 단추 잘못 눌러 멜로디는 그대로인데, 웬 랩 리듬에 구닥다리 386들은 어리둥절도 했다. 그래도 ‘연봉’이나 ‘주식’이 끼어들 틈은 없었다. 서로 “야~, 하나도 안 변했다”며 놀고 자빠졌는데, 2학년이 말한다. “아니, 많이 변했다. 나도, 우리도!” 고해성사라도 하듯.
80년대를 산 이들은 ‘나’보단 ‘우리’에 익숙했다. 중뿔나게 착했던 게 아니라, 시대가 그러했다. ‘포트폴리오’도 몰라, 미련스레 ‘올인’만 했다. 그런데 ‘머물러 있는 청춘인 줄 알았는데’, 돌아보니 어깨 걸던 ‘우리’는 다 어디 가고, ‘나’들만 빽빽하다. 뒤늦게 ‘나’로 사는 법을 벅벅대며 배워 왔다. 그러나 마음엔 늘 구질구질한 자책이 커피잔 속 설탕찌꺼기처럼 끈적거리나 보다. ‘우리’는 ‘민중’이고, ‘노동자’이기도 했다. 이제 잃어버린 그 말들은 ‘반갑다 친구야’가 되고 있다. 나이 마흔이 되자, 공자는 ‘미혹되지 않는다’(불혹) 했고, 맹자는 ‘망설이거나 두려워하지 않게 됐다’고 했다. 그런데 그날의 마흔 즈음들은 여전히 혼란스러워하고, 망설이고, 두려워했다. 세상을 뒤덮은 광고는 ‘인생을 바꾸라’고 하고(체인지 더 라이프), ‘인생은 원더풀하다’(라이프 이즈 원더풀)고 한다. 어떻게 바꿔야, 얼마나 원더풀해질까? ‘당신을 앞서게 하는 힘-하나금융그룹’이 답을 알려 준다. ‘남’보다 앞서도록 ‘나’(지위, 수입 등)를 바꿔야 원더풀해지나 보다. ‘우리’가 ‘남’으로 바뀐 지 오래됐다. 이 강퍅한 ‘나’의 바다를 묽힐 길은 그래도 영혼이 맑던 그날의 ‘우리’일 텐데 …. 비록 간장 종지만큼 오므라들었더라도. 친구들에게 시 한편 띄우고 싶은데, “그대 아직 늙지도 않았거늘/ 어쩌다 불우함을 한하는고” 두보의 시가 좋을지, “그대 모르는가, 황하의 물/ 하늘로부터 와서 바다로 들어가면/ 다시 돌아오지 못하는 것을” 하는 이태백의 시가 좋을지. 망설여진다. 권태호/경제부 기자 ho@hani.co.kr
80년대를 산 이들은 ‘나’보단 ‘우리’에 익숙했다. 중뿔나게 착했던 게 아니라, 시대가 그러했다. ‘포트폴리오’도 몰라, 미련스레 ‘올인’만 했다. 그런데 ‘머물러 있는 청춘인 줄 알았는데’, 돌아보니 어깨 걸던 ‘우리’는 다 어디 가고, ‘나’들만 빽빽하다. 뒤늦게 ‘나’로 사는 법을 벅벅대며 배워 왔다. 그러나 마음엔 늘 구질구질한 자책이 커피잔 속 설탕찌꺼기처럼 끈적거리나 보다. ‘우리’는 ‘민중’이고, ‘노동자’이기도 했다. 이제 잃어버린 그 말들은 ‘반갑다 친구야’가 되고 있다. 나이 마흔이 되자, 공자는 ‘미혹되지 않는다’(불혹) 했고, 맹자는 ‘망설이거나 두려워하지 않게 됐다’고 했다. 그런데 그날의 마흔 즈음들은 여전히 혼란스러워하고, 망설이고, 두려워했다. 세상을 뒤덮은 광고는 ‘인생을 바꾸라’고 하고(체인지 더 라이프), ‘인생은 원더풀하다’(라이프 이즈 원더풀)고 한다. 어떻게 바꿔야, 얼마나 원더풀해질까? ‘당신을 앞서게 하는 힘-하나금융그룹’이 답을 알려 준다. ‘남’보다 앞서도록 ‘나’(지위, 수입 등)를 바꿔야 원더풀해지나 보다. ‘우리’가 ‘남’으로 바뀐 지 오래됐다. 이 강퍅한 ‘나’의 바다를 묽힐 길은 그래도 영혼이 맑던 그날의 ‘우리’일 텐데 …. 비록 간장 종지만큼 오므라들었더라도. 친구들에게 시 한편 띄우고 싶은데, “그대 아직 늙지도 않았거늘/ 어쩌다 불우함을 한하는고” 두보의 시가 좋을지, “그대 모르는가, 황하의 물/ 하늘로부터 와서 바다로 들어가면/ 다시 돌아오지 못하는 것을” 하는 이태백의 시가 좋을지. 망설여진다. 권태호/경제부 기자 ho@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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