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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편집국에서] ‘그들’과 김봉진이 다른 점 / 김경락

등록 2020-01-22 17:59수정 2020-01-23 09:49

김경락 ㅣ 산업팀장

“호의가 반복되면 권리인 줄 안다.”

세밑부터 최근까지 한달 남짓 동안 재계 이슈를 일별하다 보니 영화 <부당거래>(2010, 류승완 감독)에 나온 대사 한 구절이 떠올랐다. 검사 역을 맡은 배우 류승범의 대사다. 갑질에 찌든 부패 검사의 경찰(황정민)을 향한 독설이다. 이 대사는 영화 속 맥락과는 별개로 일상생활에서 종종 쓰이며 ‘명대사’ 반열에 올랐다. 최근 재계에서 잇달아 벌어진 일들에 이 명대사를 변주하면, 이쯤 될 듯싶다. “비상식이 반복되면 상식인 줄 안다.”

먼저 한진그룹의 ‘남매의 난’. 성탄절 직전 총수 일가의 맏이 조현아 대한항공 전 부사장이 그룹 총수이자 동생 조원태 회장을 겨냥해 포문을 열었다. 재계에선 이 싸움 배경 중 하나로 ‘상속세’ 문제를 짚는다. 고인이 된 아버지 조양호 전 회장의 지분을 물려받은 현태·현아·현민 세 남매는 600억원 안팎의 상속세를 내야 한다. 문제는 이 중 현직에 복귀하지 않아 ‘월급’ 못 받는 현아씨가 뿔이 난 게 이 싸움에 숨겨진 배경이란 것이다. 조원태 회장도 지난해 11월 미국에서 한 기자간담회에서 이런 배경을 슬며시 언급한 바도 있다. 이 풍문이 사실이라면 현아씨는 회삿돈으로 세금 내기 위해 세밑에 그 난리를 피웠다는 얘기가 된다. 한진 총수 일가의 보수는 ‘하는 일’이 아닌 ‘세금 납부 여력’에 맞춰 책정된다는 이야기인가.

두번째는 비상경영체제 속 씨제이(CJ)그룹 임원 인사. 이재현 그룹 회장은 그룹 내 2인자이던 신현재 씨제이제일제당 대표를 씨제이기술원장으로 발령을 내며 2선으로 물러나게 했다. 그룹 쪽 인사들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씨제이를 비상경영체제로 내몬 데 대한 문책 성격이 있다고 한다. 무리한 인수합병 추진과 기대만큼 사업 시너지가 나지 않아 그룹 재무구조를 불안정하게 했다는 이유다. 그룹을 어렵게 만든 사업 결정에 총수는 책임은 없고 ‘문책할 권한’만 있다는 것인지 의문이 들었다. 총수의 책임 범위가 그렇게 한정적이라기엔 이 회장이 받는 보수는 너무 많다. 그는 2018년 한해에만 씨제이·씨제이제일제당·씨제이이엔엠(ENM) 세곳에서 모두 160억원 남짓을 받았다. 재벌그룹 총수 중 보수총액 순위 1위다. 같은 기간 신현재 대표는 24억원을 받았다.

얼마 전에는 롯데 신동빈 회장이 그룹 계열사 사장과 임원들을 모조리 불러모아 호통을 쳤다. “외환위기 때보다 더 심각한 상황”, “과거 롯데는 다 버려라”, “수익 안 나는 사업은 다 접는다”. 일부 언론에선 오늘날 삼성을 낳게 한 분기점인 이건희 삼성 회장의 1993년 ‘신경영’ 선언에 빗대기도 했다. 유통공룡 롯데가 어려움에 빠진 건 전자상거래의 급부상 같은 산업 환경의 변화가 주된 원인이지만, 사업 개편이 급할 때 총수 일가들이 그룹 승계를 놓고 지난한 ‘형제의 난’을 벌이고, 뒤이어 국정농단 사건에 연루되면서 ‘경영 공백’이 길었다는 점도 빼놓을 수 없다. 롯데의 사전에도 ‘총수 책임’이란 어구는 누락된 걸까.

비상식적인 일들이 재계에선 하루가 멀다 하고 터져 나오다 보니 많은 사람들은 ‘일상’처럼 여기는 수준에 이르렀다. 위에서 언급한 사안 외에도 뇌물 혐의로 재판을 받고 있는 삼성전자 부회장 ‘이재용 집행유예 만들기’에 저명한 대법관, 언론인, 고위 검사, 학자 출신 등 외부 인사를 끌어들이며 전사적인 노력을 기울이는 삼성의 행태는 ‘비상식의 상식화’ 현상의 화룡점정이다.

흥미로운 건 이런 현상의 근본 뿌리는 총수 일가가 경영에 대한 집착을 놓지 않기 때문이다. ‘소유와 경영의 분리’가 항상 정답은 아니지만 요즘 주요 재벌그룹의 행태는 한국적 특수성으로 말미암아 소유와 경영의 분리가 필요하다는 걸 웅변한다. 이런 맥락에서 지난해 말 김봉진 우아한형제들 대표의 언론 인터뷰 한 대목은 울림이 있다. “경영권에 집착하지 않았다. 자식한테 물려줄 생각은 눈곱만큼도 없다… 창업은 했지만 내가 회사를 지배할 순 없다. 창업자가 꼭 1대 주주라야 한다고도 생각하지 않는다. 회사는 창업자보다 오래 살아야 한다. 수많은 사람의 생계가 달렸다.”

sp96@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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