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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편집국에서] 제3의 애국, 길이 되기까지 / 김경욱

등록 2020-02-02 18:50수정 2020-02-03 17:09

김경욱 ㅣ 전국2팀장

소년은 여자가 되고 싶었다. 성을 바꾸려면 수술을 해야 했고, 모아둔 돈에서 수술비는 500만원이 모자랐다. 가진 거라곤 힘밖에 없는 소년이 수술비를 벌기 위해 택한 길은 바로 ‘씨름’이다. 대회에서 우승하면 장학금 500만원을 준단다. 여자가 되기 위해선 500만원이 필요한데, 그것을 따내기 위해선 웃통을 벗고 남학생들과 맨살을 부대껴야 한다.

2006년 개봉한 영화 <천하장사 마돈나>는 ‘마돈나’가 되기 위해 우선 ‘천하장사’부터 돼야 하는 고교 1년생 오동구(류덕환)를 통해 성소수자가 자신의 삶을 지켜내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모습을 생생하게 보여준다. 영화는 기본적으로 유쾌·발랄하지만, 순간순간이 시련이고 도전인 소수자의 삶에 이따금 코끝이 찡해온다.

10년도 더 지난 옛 영화 속 주인공 동구가 불현듯 생각난 것은 지난달 22일 변희수 하사의 기자회견을 보면서였다. 이날 육군으로부터 ‘강제 전역’ 판정을 받은 변 하사는 “성 정체성을 떠나 나라를 지키는 군인으로 남을 수 있게 기회를 달라”고 눈물로 호소했다. 또한 그는 “저와 같은 소수자들이 국가를 지키고 싶은 마음 하나만 있으면 복무할 수 있는 세상을 만들 수 있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변 하사에게서 동구를 떠올린 것은 같은 성소수자란 점 외에도 그들이 딛고 선 환경의 유사성 때문이었을 것이다. 동구가 하는 씨름은 남성성이 극대화된 스포츠다. 그 최고봉에 있는 천하장사라는 타이틀은 원시적 남성성과 육체의 극단을 드러낸다. 변 하사가 복무한 군대란 조직도 다르지 않다. 남성성이 맹렬히 표출되는 집합체다. ‘여성 군인 1만명 시대’에도 여전히 대한민국에서는 군대와 군인은 남자의 상징으로 여겨진다. 변 하사나 동구는 남성성이 가장 강조되는 곳에서 자신의 여성성을 지키기 위해 발버둥 친 것이다.

변 하사가 수술을 결심한 이유는 이렇다. “줄곧 억누르며 이겨냈지만 젠더 디스포리아(성별 불일치)로 인한 우울증 증세가 하루하루 심각해져, 이대로라면 더는 군 복무를 할 수 없겠다는 생각이 계속 들게 됐습니다.” 마음의 병을 이겨내고 군 생활을 계속하기 위해 받은 수술이 결국 강제 전역 조처의 이유가 됐다.

군이 그에게 전역 처분 결정을 내린 근거는 군인의 신분과 임용 등을 규정한 군인사법이다. 이 법 제37조 1항 1호는 “심신장애로 인해 현역으로 복무하는 것이 적합하지 아니한 사람”을 본인의 뜻과 관계없이 전역시킬 수 있도록 규정하고 있다. 성전환 수술을 한 것을 군은 ‘심신장애’로 판단해 강제 전역 처분한 것이다.

그런데 생각해보자. 여성으로서의 정체성을 가진 변 하사가 그에 부합하는 수술을 한 게 과연 심신장애일까? 그는 수술을 통해 ‘몸 안의 나’와 ‘주어진 몸’을 일치시켜 심신장애를 해소했다고도 볼 수 있다. 군이 장애라고 판단한 ‘음경 상실’과 ‘고환 결손’ 역시 여성으로서는 전혀 장애가 아니다. 있는 것이 오히려 부자연스럽다. 다시 말해 군은 성전환 수술을 한 군인에 대해 남성 성기가 없다는 이유를 들어 임무 수행을 할 수 없다고 판단한 셈이다.

변 하사는 우리가 당연하게 생각해온 군인이란 관념에 균열을 냈다. 그를 향한 수많은 악다구니가 판을 치지만, 분명한 것은 그의 용기가 누군가에게 희망을 줄 수 있다는 사실이다. 실제로 최근 숙명여대에 합격한 성전환자는 언론 인터뷰에서 국내 첫 트랜스젠더 변호사인 박한희 변호사를 보고 희망을 얻었다고 했다.

변 하사는 기자회견에서 소속 부대와 직속 상관들이 자신의 결정을 지지하고 응원해줬다고 말했다. 영화에서는 동구의 엄마가 특히 그러했다. “앞으로 네가 생각한 것보다 훨씬 더 외로울지 몰라. 그래도 괜찮아?” 자신의 말에 눈물을 흘리며 차마 얼굴을 들지 못하고 고개만 끄덕이는 아이의 선택을 엄마는 받아들인다. “그래, 이제 엄마가 그거 존중해줄게.”

길은 처음부터 있었던 것이 아니다. 당연시돼온 것을 전복하고 흔드는 누군가의 용기 있는 발걸음들이 모여 길이 되고, 우리 사회를 변화시켜왔다. 변 하사는 군의 결정과 관련해 법적·제도적 싸움을 준비 중이다. 그의 앞길에 행운과 사랑이 가득하길 빈다.

dash@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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