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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조해진의 세계+] 전염병 시대의 공존

등록 2020-02-02 18:55수정 2020-02-03 02:37

조해진 ㅣ 소설가

얼마 전 전태일문학관에서 기획한 ‘시다의 꿈’이라는 전시회에 참여했다. 알다시피 ‘시다’는 견습공을 의미하는 일본어 ‘시타바리’에서 유래했는데, 산업화 시대를 겪은 사람들에게는 이 단어가 재봉사의 일을 돕는 어린 여공의 이미지로 환기되지 않을까 싶다. 그리고 이 ‘여공’ 곁에는 없으나 실존하는 상징적인 사람, 전태일이 있다.

사람들은 알까. 1970년, 전태일이 근로기준법전을 품에 안은 채 청계천에서 분신하기 전까지 재봉틀을 돌리는 공장 안에는 대개 환풍기가 없었다. 그 흔한 환풍기 하나 없어서 당시 노동자들은 결핵이나 폐렴과도 싸워야 했다. ‘시다의 꿈’에 참여한 소설가들은 1980년대 청계천 평화시장에서 시다로 일했던 여성 노동자 네 명의 이야기를 소설로 써서 전시에 공개했는데, 그중 정세랑의 <태풍의 이름을 잊은 것처럼>에는 이런 구절이 있다. “정신없이 일하다가 올려다보면 공장에 하나밖에 없는 환풍기가 윙윙 돌고 있었다. 전태일이 얻게 해준 환풍기였다.”

전시 참여 작가로서 나 역시 자료를 찾아 읽고 인터뷰를 했는데, 그 과정에서 의미 있는 사실을 발견했다. 그 네 명의 과거 시다 ‘언니’들이 현재 저마다의 노동 현장에서 다른 노동자와 공존을 고민하면서 실천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가령, 소규모의 봉제공장을 운영하는 사업주가 되었음에도 갑의 위치에 있기보다 고용된 다른 노동자들과 똑같이 일하는 한편, 공장이 문을 닫을 때를 대비해서 수익이 마이너스일 때도 그들의 퇴직금은 조금씩 떼어놓는 과거의 시다 K처럼. 이런 삶의 방식은 그들이 나눠 가진 공감의 경험 덕분일 것이다. 그들은 야학에 다니면서 세상의 불합리함에 눈떴고 그들을 믿어준 사람들과 함께 노동환경을 개선하기 위해 애썼다. 바로 나 아닌 다른 사람의 처지와 그 마음까지 헤아려보는 경험을 한 것이다. 빌딩 청소를 하는 노동자에게 화장실 비품 칸에서 밥을 먹게 하고 임대아파트에서 사는 사람들에게는 별도의 엘리베이터와 계단을 쓰게 하는 행위, 몰카를 찍어 상대 여성에게 고통을 주고 집 근처에 특수학교나 청년을 위한 임대아파트가 들어서는 것을 막는 행위는 모두 이 공감의 경험이 없었기 때문이 아닐까.

공감을 겪어보게 해주는 매체 중 하나가 소설일 것이다. 나 아닌 다른 사람의 삶을 상상으로 살아보는 것, 어쩌면 그것은 국경 밖으로의 여행 같은 것인지도 모르겠다. 한 사람이 하나의 국가라면, 그들의 삶의 경계는 국경이 될 테니 말이다. 평생 국경 밖을 상상하지 않는 국가는 안전하고 자족적일지언정 더 넓고 더 아름다운 풍경은 품지 못한다. 그 풍경 안쪽에 엷게 깔린 불안과 그 불안을 딛고 불현듯 차오르는 생의 의지라면 더 말할 것도 없다. 경계 밖을 모르는 삶은 허망하기만 하다.

소설가가 된 뒤로 가장 자주 듣는 질문 중 하나는 ‘당신은 왜 쓰는가?’인데, 이 질문에 나는 답하곤 한다. 인간답게 살기 위해서라고, 인간답게 사는 건 나 아닌 사람이 되어보는 것이라고, 내 소설을 읽는 누군가가 내 소설 속 인물이 되어봄으로써 나와 당신의 삶이 확장되길 바란다고, 왜냐하면 노력하지 않으면 세상의 온도는 결코 올라가지 않을 테니까. <태풍의 이름을 잊은 것처럼>에는 이런 문장도 나온다. “바빠서 생각이 뚝뚝 끊기고 말았지만 가끔 그러지 않을 때면 누군가 우리를 사랑해서, 안타까이 여겨서 몸을 태웠다는 것을 떠올렸다.”

전염병의 시대에 다시 공존을 생각한다. 모두의 생명이 귀하니 철저하게 예방하고 검역하는 것이 당연하지만, 이럴 때일수록 공존에 대한 고민도 뒤따라야 하지 않을까. 공존이 전제되지 않은 희망이란 한시적일 뿐이니. 알베르 카뮈의 <페스트>를 다시 읽는 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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