또 이가 빠졌다. 흔들거리던 의치가 빠진 것이다. 지난 10년간 잇따라 이빨이 상해 자주 치과를 다녔다. 비용 부담, 소비 시간, 정신적 스트레스는 실로 컸다. “그래서 제대로 양치질하라고 예전부터 얘기해왔건만” 하고 아내는 탄식했다. 거기에 뭐라 대꾸할 말은 없지만, 속으론 이렇게 투덜거린다.
“그렇긴 하나, 이 나이 되도록 살아 있는 건 내 예정표에 없었던 거요….”
부모님은 모두 60대 초에 돌아가셨다. 그때 어머니는 이미 모두 틀니였는데, 늘 “너희들을 하나둘 낳다 보니 영양분을 빼앗겨 이가 다 빠졌다”고 하셨다. 내가 어렸을 때는 이 다 빠진 어른이 드물지 않았다. 교토시 한쪽의 공예섬유대학 뒷문 가까이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는데, 수위 아저씨는 근처 아이들에게 틀니를 빼내 보여 기겁을 한 아이들이 도망쳐 달아나는 것을 보며 재미있어했다.
나는 1951년생이다. 그때 조국에서는 조선(한국)전쟁이 한창이었다. 사춘기 땐 베트남에서 무자비한 살육이 자행되고 있었다. 대학에 입학했을 무렵 한국은 군사독재의 절정기였고, 두 형도 투옥돼 있었다. 30살을 넘겼을 때의 내겐 만사가 ‘임시적인 삶’이었다. 중장기적인 계획을 세우고 인생을 설계하는 건 생각도 할 수 없었다.
50살 가까이 돼서야 우연히 대학에 취직했을 때 놀랐던 것들 중 하나는, 주변 동료들이 정년 때까지의 수입과 지출을 치밀하게 계산해서 은행 대출을 받아 집을 사는 모습이었다. 사회조직 속에 짜여 들어간 머조리티(다수, 주류)의 ‘안정’이라는 게 이런 것인가 하는 생각을 했다. 어디에서 살고 어떻게 죽을지도 예측할 수 없는데, 노후를 대비한 양치질을 하다니, 무리였다. 이 나이 되도록 어떻게든 살아온 것은 수많은 우연의 결과에 지나지 않는다.
일본에서 태어난 나는 일본 사회밖에 모르면서도, 일본에서 인생 마지막까지 보내겠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원래 일본이라는 나라가 재일 조선인을 배제하는 일에 여념이 없었다. 우리는 1960년대 말까지 ‘국민건강보험’에도 가입할 수 없었다.
1년 뒤면 나는 만 70살이다. 정년퇴직이다. 그야말로 노인이다. 예나 지금이나 스스로 죽고 싶다고 생각한 적은 없지만 오래 살기를 바란 적도 없다. 살아 있는 것 자체를 가치로 여기는 생각은 인생의 자기목적화라고 해도 좋을 것이다. 인생의 가치는 그런 차원과는 다른 것이 돼야 한다. 진실, 아름다움, 정의, 공정, 평화 등 개개인의 삶을 넘어선 가치를 위해 사람은 살아가는 게 아닐까.
물론 그 ‘가치’가 가짜거나 왜곡된 것일 경우도 많다. 거짓 ‘가치’가 사람들을 통제하고 지배하는 데에 이용돼온 역사를 우리는 알고 있다. 그래도 그것을 비판하고 맞서 싸울 수 있는 것은 그런 보편적 가치라는 ‘기준’을 공유해야 한다는 원칙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지금 눈앞에서 전개되고 있는 것은 그 원칙조차 내팽개쳐지고 있는 세계, ‘기준’이 필요하다는 의식조차 잃어가고 있는 세계다.
역사의식과 이상을 잃어버린 세계에서는 수단을 가리지 않고 눈앞의 이익만 추구하는 사람들이 큰소리치게 된다. 그 전형적인 사례가 중대한 사고가 났음에도 원전 재가동을 고집하는 사람들이다. 핵전쟁 위기가 닥쳤는데도 무기 개발과 판매에 열중하는 사람들, 지구환경 파괴의 악영향이 이토록 명백해졌는데도 화석연료의 대량소비를 멈추려 하지 않는 사람들 등이다. 이런 사람들의 사고상의 시간 척도는 짧고 시야는 협소하다. 자신이 살아 있는 짧은 시간, 자신이 살고 있는 좁은 국가밖에 안중에 없다. 트럼프 정권도 아베 정권도 그런 사람들을 대표한다.
미국에서는 또 대통령 선거가 다가왔다. 지난 선거를 전후해서 나는 몇 번이나 ‘악몽’의 조짐에 대해 얘기했다. 그것이 조짐이 아니라 현실이 됐다. 트럼프 대통령 등장 이후 이 짧은 기간에 얼마나 많은 파괴와 상실이 일어났나. 팔레스타인에 대한 이스라엘의 불법적인 침략과 지배가 트럼프 정권의 강력한 지지 속에 진행되고 있다. 미국은 이란 핵합의에서 일방적으로 탈퇴했으며, 새해
초두 이란의 요인을 공공연히 살해했다. 살기 위해 필사적으로 미국으로 향하던 중남미 난민들은 국경에서 저지당했다. 일본은 천문학적인 가격의 미국제 무기를 아낌없이 사들이면서, 주민들의 반대에도 오키나와 헤노코의 새 미군기지 건설을 강행하고 있다.
트럼프가 북핵 문제를 ‘딜’(거래) 재료로 삼은 뒤 조선(한)반도의 군사적 위기는 일단 멀어진 듯 보였다. 나를 비롯해 많은 사람들이 안도했고, 트럼프 정권에 일루의 희망을 걸기도 했다. 하지만 우리는 다시 험난한 앞길을 예상하고 각오를 다져야 할 것 같다. 횡포하기 짝이 없는 정권이 조선만은 예외 취급해줄 것이라고 낙관할 근거가 없기 때문이다.
미국에서 들리는 “4년 더!”라는 트럼프 지지자들의 외침은 마태오복음서에 나오는 “(예수를) 십자가에 매달아라, 매달아라!”라는 ‘민중’의 야비한 외침을 떠올리게 한다. 트럼프는 저 혼자 악인인 게 아니다. 히틀러도 아베 신조도 그들 혼자가 아니다. 주변에 그들을 뒤따르며 국물을 얻어먹으려 모여드는 다수의 사람들이 있다. 이성과 지성이 쇠약해진 세계에서는 사람들의 행동 기준이 이기적인 이익밖에 없다.
한나 아렌트는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에서 “악의 평범함”이라는 탁월한 고찰을 제시했다. 그것은 막대한 희생의 대가로 얻게 된 평화를 위한 고찰이다. 하지만 그것도 크고 작은 아이히만들이 끊임없이 출현하는 것을 막을 힘이 되진 못했다. 국회에서 태연히 거짓말을 지껄이는 정치가, 자료를 은폐하고도 부끄러움을 모르는 관료, 그것을 제대로 보도하려 하지 않는 미디어, 그런 상황을 알면서 멍하니 사고정지 상태에 계속 빠져 있는 다수 국민. 일본 사회의 이런 현실을 보고 있노라면 그런 생각이 점점 더 강해진다. 일본 정부는 저출산 고령화 때문에 정년을 연장하려 하는 한편으로 의료비나 사회보장비는 억제하려 하고 있다. 켄 로치 감독이 영화 <나, 다니엘 블레이크>(2016년)에서 묘사한 것처럼, 노인과 사회적 약자에게 지옥이 기다리고 있다.
이 나이까지 살아남았기에 ‘악몽의 시대’를 목격하게 됐다. 형들이 옥중에 있던 군사정권 시절에 “나는 그저 두 눈 부릅뜨고 그 운명이 어디로 향할지 자세히 끝까지 지켜보라고 스스로에게 명했다.”(<나의 서양미술 순례>
, 1991년) 지금은 이빨 빠진 무력한 노인이 됐지만, 30년 전에 한 그 말을 다시 나 자신에게 들려주고 있다. 이빨은 그렇다 치고, 눈만큼은 부릅뜨고 지켜볼 작정이다.
서경식 ㅣ 도쿄경제대 교수, 번역 한승동/독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