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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전치형, 과학의 언저리] 민식이가 남긴 숙제

등록 2020-05-07 16:19수정 2020-05-08 02:40

고 김민식군의 부모와 이재원 변호사(오른쪽)가 4월27일 대전지방법원 천안지원에서 열린 김군 교통사고 사망 사건에 대한 선고재판이 끝난 뒤 취재진에게 심경을 말하고 있다. 최예린 기자 floye@hani.co.kr
고 김민식군의 부모와 이재원 변호사(오른쪽)가 4월27일 대전지방법원 천안지원에서 열린 김군 교통사고 사망 사건에 대한 선고재판이 끝난 뒤 취재진에게 심경을 말하고 있다. 최예린 기자 floye@hani.co.kr

‘민식이법’이라고 일컫는 특정범죄 가중처벌 등에 관한 법률 개정안이 설명하는 개정 이유, 즉 “자동차의 운전자가 어린이보호구역에서 어린이 안전에 유의하면서 운전하도록 함으로써 교통사고의 위험으로부터 어린이를 보호하기 위하여”라는 말에 반대하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자동차가 사람을 해칠 수 있다는 사실은 자명하고, 사회는 어린이를 특별히 보호해야 한다는 생각에는 상당한 합의가 이루어져 있다. 하지만 어린이 교통사고 문제 해결을 위해 어떤 조치를 어떤 정도로 해야 하는지 합의하기는 쉽지 않다.

가장 간단한 방법은 모든 운전자가 어린이보호구역(스쿨존)에서 항상 주위를 살피고 브레이크 페달에 발을 올리는 것, 그리고 어린이와 보호자도 각별히 주의하면서 이동하는 것이다. 물론 이렇게 하자는 교육과 캠페인만으로 모든 사람이 행동을 바꾸지는 않는다는 것을 우리는 잘 알고 있다. 사람을 항상 믿기는 어렵다고 생각하면 우리는 과격한 방법을 시도할 수도 있다. 가령 도시계획의 원칙을 새로 짜서 스쿨존에 차량의 진입을 막는 것이다. 스쿨존 주위의 도로를 봉쇄할 수도 있고 운전자가 불쾌할 정도로 과속방지턱을 높고 촘촘하게 설치할 수도 있다. 그러나 우리는 이런 전략이 강한 반발을 낳는다는 것도 알고 있다.

누군가 제안할 법도 한데 논의가 없는 해결책 하나는 ‘4차 산업혁명’의 테크놀로지에 의존하는 방식이다. 스쿨존에 진입하는 차의 위치를 자동으로 경찰청 관제 시스템으로 보내고, 이 시스템이 자동차의 전자제어장치와 통신하면서 운전자의 의지와 상관없이 브레이크를 작동시킨다. 차량 감지 센서를 곳곳에 달아놓고 차가 스쿨존을 떠날 때까지 시속 10㎞ 이내로 원격조종한다. 운전자에게서 차의 제어권을 일시적으로 빼앗아 자동차를 (경찰의 통제를 받는) 자율주행차로 만드는 것이다. 효과는 확실하겠지만 실제로 구현하기는 어려운 시스템이다.

이렇게 극단적인 방법들 대신에 우리가 결국 채택하는 것은 ‘민식이법’에서처럼 어린이보호구역에서 발생한 사망이나 상해에 대해 처벌을 강화하거나 도로교통법을 개정해서 무인 교통단속 장비, 신호기, 안전표지 등을 설치하도록 하는 정도다. 우리는 테크놀로지나 인프라에 모든 강제력을 부여해서 일거에 문제를 해결하기보다는 운전자의 의지나 습관을 유도하는 느리고 간접적인 방식을 취하고 있는 것이다. 그 과정에서 운전자에 대한 처벌이 과도하다거나 단속 장비의 효과가 없다는 식의 논란도 생긴다.

문제를 속 시원히 해결하지 못하면서 논란을 일으키는 대책으로 수렴하게 되는 것은 단지 예산이나 기술력이 부족해서가 아니다. 우리가 운전자의 의지나 습관에 호소하는 것은 우리가 여전히 운전자를 영혼이 있는 존재, 자율적인 시민으로 가정하고 있기 때문이다. 지금의 법과 정책이 상정하는 운전자는 때로 깜빡하고 실수하기도 하지만, 카메라와 신호기와 안전표지를 보면서 이곳이 우리가 특별히 보호해야 하는 사람들이 있는 공간이라는 사실을 알아차리고 행동할 수 있는 존재다. 간단히 말해 ‘어린이보호구역’의 의미가 무엇인지 이해하는 사람이다.

어린이날 직전에 나왔다가 논란을 일으킨 ‘스쿨존을 뚫어라-민식이법은 무서워’라는 제목의 스마트폰 게임은 운전자에 대한 이런 가정을 포기하고 있다. 스쿨존에 진입한 택시가 반대 방향으로 달려오는 어린이들을 좌우로 피해야 하고, 얼마 못 가서 어린이와 충돌하면 바로 경찰에게 체포된다는 설정의 게임이다. 이 게임은 운전자가 사회적 합의와 법이 작동하는 공간 속에서 스스로 판단하고 행동하는 존재라는 점을 부정한다. 대신 운전자를 그저 어린이라는 장애물을 피해서 스쿨존을 뚫는 기계적 행위자로 가정한다. 이 게임은 어린이를 도로에 난데없이 뛰어드는 장애물로 희화한다는 비판을 받았지만, 그에 못지않은 문제는 게임이 운전자를 영혼 없는 로봇 같은 존재로 희화한 것이다.

“갑자기 튀어나오는 초등학생들을 피하세요. 초등학생을 건드리면 큰일 나요.” 스쿨존에서의 운전을 이런 식의 게임 미션처럼 생각해서는 ‘민식이법’의 문제를 토론할 수도 없고 사고를 막지도 못한다. 운전은 법과 제도와 도덕과 기술이 복잡하게 얽힌 공간에서 이루어지는 사회적 행위다. 이 복잡한 조건 속에서 자동차와 운전자와 어린이의 행동을 조금씩이라도 바꿔나가는 것이 민식이가 우리에게 남긴 숙제일 것이다.

카이스트 과학기술정책대학원 교수·과학잡지 <에피> 편집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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