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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기고] 다르지만 같은 언어, 낙인과 지원 / 권희정

등록 2020-05-07 18:23수정 2020-05-08 02:41

권희정 ㅣ <미혼모의 탄생> 저자·인류학 박사

필자는 2008년부터 약 5년간 한국미혼모지원네트워크 사무국장으로 근무했다. 막 일을 시작하고 미혼모 현실을 잘 알기 위해 당사자들을 만나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도무지 만날 수 없었다. 시설을 가도 원장님이나 상담사들, 정책 포럼을 가도 공무원이나 학자들만 만날 뿐이었다. 간혹 사례자 1, 2란 번호를 단 미혼모들이 나와 발표를 했지만 이들이 나오면 조명이 어두워지거나 심지어 칸막이 뒤에서 발표해 누구인지 알 수 없었다.

이후 시간이 조금 흘렀고 당사자 조직을 만들기 위해 모인 몇몇 미혼 엄마들을 알게 되었다. 어느 날 그들과 함께한 정책 세미나에 청중으로 참석했다. 질의응답 시간에 한 청중이 ‘미혼모 복지 정책에 관해 박사 논문을 썼는데 자신이 만나 본 미혼모들은 거의 잘생긴 남자들에게 빠져 미혼모가 되더라’라는 발언을 했다. 그러자 필자와 함께 있던 미혼 엄마가 손을 들고 ‘제가 잘생긴 남자 만나 미혼모가 된 아무개’라고 말한 뒤 미혼모에 대한 편견과 정책 부재 문제를 지적했다. 발표장은 잠시 동안 정지화면처럼 움직이지 않았다. 아마도 미혼모 당사자가 그곳에 있으리라고는, 게다가 공적인 자리에서 자신의 존재를 드러내며 의견을 피력하리라곤 꿈에도 생각지 못했기 때문일 것이다. 그만큼 우리 사회의 미혼모는 성도덕과 가정윤리를 위반한 여자들이라는 낙인의 높은 벽 뒤에 숨어야만 하는 존재였다.

​그로부터 10년 이상이 지났다. 미혼모에 대한 차별과 낙인이 그때보다 많이 없어진 것 같다. 당사자 조직도 생겼고, 당당히 매스컴에 나와 인터뷰도 하고, 미혼모 지원에 대한 공감대도 커진 것은 확실하다. 그런데 문제는 그것뿐이란 것이다. 즉, 우리 사회 미혼모에 대한 인식과 언설은 낙인 아니면 지원뿐이다. 미혼모는 ‘나쁜' 아니면 ‘불쌍한'이란 프레임에 갇혀 있다. 다르지만 다르지 않은 이 두 개의 언어가 말하는 것은 결국 미혼모가 처한 환경은 과거와 그다지 달라지지 않았음을 역설적으로 말하는 것일지 모르겠다. 왜냐하면 미혼모 ‘문제’는 결혼, 임신, 출산, 그리고 가족 전반에 대해 더 근본적인 질문을 던지는 ‘문제’와 연결되기 때문이다. 이것은 우리 사회의 결혼과 가족에 대한 새로운 정의를 요구하며, 임신과 출산은 결혼 여부와 상관없이 개인 생애 과정에서 언제든 일어날 수 있다는 사고의 전환과 어떤 선택을 하든 그로 인한 불이익이 없도록 정책을 마련하는 일과 연결된 문제다. 물론 결혼, 출산엔 돈이 든다. 그러나 마치 그것이 하나의 연결 선상에서 일어나고 누구나 그런 과정을 거쳐야 하는 것처럼 “돈이 있어야 결혼을 하고 결혼을 해야 애를 낳는다”고 말하는 건 옳지 않다. 미혼모 문제는 이 통념을 깨고, 나아가 법률혼, 중산층 핵가족, 이성애에 기초한 소위 ‘정상 가족’이란 뿌리 깊은 가족 이데올로기에서 자유로워지는 방향을 고민하고, 어떻게 이를 정책에 반영할 수 있을지 노력하는 일과 연결되어야 한다.

미혼모를 돕자 하고 한편에서는 결혼한 연예인의 출산이 속도위반이니 아니니 하는 뉴스가 소비되고, 출산율 높인다며 신혼부부 중심의 정책을 펼치는 사회에서 미혼모는 여전히 나쁘거나 불쌍할 수밖에 없다. 미혼모들에게 분유 지원이나 직업교육은 정말 필요하다. 그러나 미혼 한부모 가족이 진정 평범한 시민으로서의 권리를 차별 없이 누릴 수 있게 하려면 바로 나 자신, 내 부모, 내 선생님, 내가 속한 지역사회와 정부가 결혼과 출산을 동일하게 보려는 완고한 생각부터 버려야 가능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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