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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조해진의 세계+] 사람을 위한 정의이길

등록 2020-05-24 18:21수정 2020-05-25 13:47

조해진 ㅣ 소설가

감옥에 갇힌 아버지를 위해 벌금을 벌러 만주에 갔다가 위안소에 끌려간 길원옥 할머니, 그의 꿈은 가수였다. 1928년에 태어난 길원옥 할머니는 2017년, 그러니까 아흔살에 이르러서야 <길원옥의 평화>라는 앨범을 발매했다. 이 앨범에는 할머니가 평소 즐겨 부르던 ‘아리랑’ 등 열다섯 곡이 수록되어 있다는데, 국내 유명 음원 사이트에는 등록되어 있지 않고 다만 유튜브에서 관련 영상을 조금은 찾아볼 수 있다. 길원옥 할머니의 육성을 바탕으로 재구성한 증언소설인 김숨의 <군인이 천사가 되기를 바란 적 있는가>에는 이런 대목이 있다. “노래밖에 없어서 노래를 불렀어. 나는 노래 부르는 사람이야.” 길원옥 할머니는 현재 치매를 앓고 있다.

1926년생인 김복동 할머니는 열다섯살에 군복 만드는 공장에 차출되어 일본으로 건너갔는데, 정작 할머니가 배를 타고 실려 간 곳은 대만에 있는 위안소였다. 대만뿐 아니라 아시아 여러 나라의 위안소에서 고통받고 돌아온 할머니는 1992년에 당신의 경험을 세상에 처음 알렸다. 1993년에는 유엔 인권위원회에서, 이후에는 미국과 유럽, 일본 등에서 피해 사실을 증언하며 ‘위안부’ 문제에 대한 국제적 관심을 이끌기도 했다. 송원근 감독의 다큐멘터리 <김복동>에서 할머니는 말씀하신다. “우리도 열심히 싸울 테니 힘내서 싸워주세요.” 김복동 할머니는 2019년에 별세했다.

최근 이용수 할머니가 공개적으로 정의기억연대(정의연)를 비판한 이후 정의연뿐 아니라 위안부 생존 할머니들이 머물고 있는 ‘나눔의 집’ 역시 논란의 중심에 서게 됐다. 나는 선뜻 분노부터 할 수 없었는데, 일본군 위안부가 있었다는 것을 세상에 알리고 일본의 사과와 배상을 받아내려는 운동을 30년 동안 해온 활동가들을 향한 일말의 지지를 내려놓기가 쉽지 않았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나는 아무것도 하지 않았으니까. 모르는 것과 아는 것이 다른 만큼 아는 것과 행동하는 것은 다르므로….

그러다가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정의연과 나눔의 집으로 들어온 후원금이 수십억원이라는데, 정부로부터 받는 보조금도 있다는데, 어째서 길원옥 할머니의 노래 한 곡 듣기가 이리 어려운 걸까. 사람들이 할머니의 노래에 더 쉽게 접근할 수 있는 방법을 생각해본 적이 없는 걸까. 김복동 할머니는 해외에 증언을 하러 갈 때 2015년까지 이코노미석을 탔다던데, 고령의 할머니에게 비즈니스 좌석 하나 제공하는 게 그렇게나 어려운 일이었던가. 나눔의 집에서 생활하고 있는 여섯 분의 생존 할머니들이 돈 때문에 제때 병원에 가지 못하고 좋아하는 음식도 맘껏 드시지 못했다는 직원들의 내부고발을 접하면서는 차라리 귀를 막고 싶은 심정이었다. 기념관을 짓고 역사 교육을 하기 위해 기금을 아꼈다는 변명은 그들만의 차갑고도 덧없는 정의일 뿐이다.

스베틀라나 알렉시예비치의 역작 <전쟁은 여자의 얼굴을 하지 않는다>에는 전쟁 뒤 평범한 삶으로 돌아가지 못한 여러 여성들의 목소리가 담겨 있다. 전쟁 당시에는 필요한 인력이었으나 전후엔 ‘억센’ 여자로 낙인찍혔기 때문이다. 남자들이 전쟁 영웅이 되는 동안 여자들은 세상에서 지워져 갔다. 할머니들은 어땠을까. 전쟁 뒤 고향으로 돌아갔을 때 그이들을 반겨준 사람이 한명이라도 있었을까. 사랑도 존중도 없이 수많은 군인들에게 이용당한 그 아픈 기억은 얼마나 끔찍하게 그이들을 괴롭혔을까.

할머니들은 끝까지 ‘사람’을 생각했다. 길원옥 할머니는 사비를 털어 세계 전쟁 피해 여성들을 위한 ‘나비기금’을 제정했고 김복동 할머니는 재일조선학교에 전 재산을 기부했다. 잘잘못은 그것대로 가리되, 할머니들은 남은 생 맘껏 웃고 즐기고 사랑할 수 있도록 기금과 시설이 운영되길 간절히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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