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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하종강 칼럼] 중대재해기업처벌법을 둘러싼 역학 관계

등록 2020-05-26 15:09수정 2020-05-27 09:54

1994년 이후 통계가 제공되는​ 2016년까지 23년 동안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국가 중 대한민국의 산재사망률은 21번이나 1위를 차지했다.

기업이 안전보건 조처를 제대로 하지 않아 노동자가 사망했을 경우 사업주가 받는 처벌이 편의점 사장이 청소년에게 담배를 팔다 걸려서 받는 처벌보다 미약하다면 어느 사업주가 노동자 안전보건에 신경을 쓰겠는가?

하종강 ㅣ 성공회대 노동아카데미 주임교수

2018년 12월 국회에서 통과된 산업안전보건법을 우리는 ‘김용균법’이라고 부른다. 2018년 12월 충남 태안 화력발전소에서 하청회사 소속 비정규직 노동자 김용균씨가 홀로 밤샘 근무를 하다가 숨진 사건이 산업안전보건법 개정 논의를 촉발시켰기 때문이다. “28년 만의 대폭 개정”이라는 언론의 찬사를 받으며 떠들썩하게 국회를 통과했지만 다 아는 것처럼 “김용균 없는 김용균법”이 되고 말았다.

이보다 앞서 2016년 서울 지하철 구의역에서 홀로 스크린도어를 수리하다가 숨진 ‘구의역 김군 사건’(아직도 우리는 그이의 이름을 감히 입에 올리지 못한 채 ‘김군’이라고만 부른다)도 김용균씨 사건과 함께 법 개정의 필요성을 상징하는 사건으로 자주 거론됐다.

“위험의 외주화 금지” 또는 “죽음의 외주화 금지”가 당시 산업안전보건법 대폭 개정의 필요성을 나타내는 표현이었다. 민주노총 공공운수노조에 따르면 2012~16년 동안 5개 발전회사에서 발생한 산업재해 346건 중 하청 노동자가 당한 것이 337건으로 전체의 97.4%를 차지했다. 하청 단계를 거칠수록 책임 소재가 불분명해질 수밖에 없으므로 위험한 작업은 아예 하청회사에 도급을 주지 못하도록 하자는 것이 당시 법 개정의 가장 중요한 화두였다.

그럼에도 어떻게 김용균씨가 담당했던 전기사업 설비 운전 및 점검·정비·긴급복구 업무와 구의역 사건의 김군이 담당했던 궤도 사업장의 점검 및 설비 보수 작업이 도급 제한은커녕 도급 승인 대상에서조차 빠져 버리는 황당한 일이 벌어질 수 있었을까? 노동자들이 도급을 엄격하게 제한해야 한다고 주장했던 많은 사업들이 도급 제한 대상에 포함되지 않았다.

지난 4월, 한익스프레스 이천 물류센터 신축 현장에서 화재가 발생해 노동자 38명이 숨지고 현대중공업에서 일주일 새 2건의 끼임 사망사고가 발생하는 등 올해에만 벌써 5명의 노동자가 안타깝게 목숨을 잃은 것 등은 바로 그 혹독한 대가를 지금 노동자들이 치르고 있다는 증거다.

이러한 일들이 과거 이명박·박근혜 정부에서 벌어졌다면 모르되 ‘김용균법’이나 관계 법령 제정은 모두 문재인 정부 아래에서 추진된 일이다. 문재인 정부의 좋은 뜻이 보수 야당의 격렬한 반대에 부딪혀 좌절된 것처럼 알고 있는 사람들이 많지만 꼭 그렇지는 않다. 정부 안에서도 반대하는 세력이 만만치 않게 있었다. 노동부에서 마련한 ‘노동부안’이 국무회의를 통과한 ‘정부안’이 되면서 노동자 보호 조처가 축소됐고 국회 환경노동위원회에서 통과된 ‘국회안’은 ‘정부안’보다 더 후퇴한 내용이었다.

정부 내각 구성을 보자. 기획재정부·산업통상자원부·국토교통부·중소벤처기업부·과학기술정보통신부·농림축산식품부·해양수산부 등은 기업의 입장을 대변할 때가 많다. 노동자와 서민의 입장을 대변하는 부처는 고용노동부·보건복지부 정도뿐이다. 기업의 눈치를 살피는 정치인·관료의 수가 노동자와 서민의 눈치를 살피는 정치인·관료의 수를 압도할 만큼 많다는 뜻이다.

여당이 국회 내에서 과반수를 차지하고 있다는 것은 정부 여당이 더 이상 이쪽저쪽 눈치 보지 않고 소신껏 정책을 밀어붙일 수 있는 상황이 됐다는 뜻이기도 하다. 정부 여당 내에 노동자와 서민의 눈치를 살피는 사람들보다 기업의 눈치를 살피는 사람이 훨씬 더 많다면 그 소신껏 밀어붙이는 정책들이 과연 누구를 위한 것일지 쉽게 짐작할 수 있다. 대통령의 선택과 결단이 중요한 영향을 끼칠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나라마다 통계 산출 방법 등이 달라 단순 비교하는 것에 주의가 필요하다는 것을 고려해도 “대한민국은 세계 최악의 노동재해 국가”라는 표현은 과장이 아니다. 1994년 이후 통계가 제공되는 2016년까지 23년 동안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국가 중 대한민국의 산재사망률은 21번이나 1위를 차지했다. 2015년 10만명당 노동재해 사망자 수가 영국은 0.4명인 데 반해 한국은 10.1명이었다. 한국 노동자는 일 때문에 사망할 확률이 영국 노동자보다 25배나 더 높다는 뜻이다. 영국과 한국의 분명한 차이 중 하나는 중대재해기업처벌법이 있는 나라와 없는 나라라는 것이다. 매년 2천명 이상이 노동재해로 사망하는 현실을 개선하기 위해서는 노동자의 안전보건을 지키지 않는 사업주에게는 사업 운영에 막대한 지장을 받을 수밖에 없도록 강력한 처벌을 하는 것이 가능해야 한다. 기업이 안전보건 조처를 제대로 하지 않아 노동자가 사망했을 경우 사업주가 받는 처벌이 편의점 사장이 청소년에게 담배를 팔다 걸려서 받는 처벌보다 미약하다면 어느 사업주가 노동자 안전보건에 신경을 쓰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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