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로나 사태를 겪으면서 ‘국가의 가치’가 새롭게 인식되고 있다. 한국갤럽의 ‘문재인 정부 3년 여론조사’ 결과를 보면, 복지 정책이 69%로 가장 높은 점수를 받았다. 보수 성향 응답자들도 긍정 평가가 많았다. 증세를 통해 자신의 삶이 나아질 것이라고 믿는 사람이 늘어야 증세 문제를 사회적 논의에 부칠 수 있는데, 지금 그런 분위기가 조성되고 있는 것이다.
문재인 대통령이 지난 25일 청와대에서 열린 ‘2020 국가재정전략회의’에서 모두 발언을 하고 있다. 이종근기자 root2@hani.co.kr
증세는 인기 없는 정책이다. 세금을 더 내라는데 좋아할 사람이 있겠는가? 부자만이 아니다. 세금을 내지 않는 면세점 이하 저소득층도 증세에 거부감을 보이는 경우가 많다. 그래서 어느 정부도 웬만해선 증세를 입에 올리려 하지 않는다. 문재인 정부도 마찬가지다.
문재인 정부는 출범 직후인 2017년 6월 저출산·고령화와 양극화 등 우리 사회의 구조적 문제에 대응할 ‘100대 국정 과제’를 발표했다. 178조원에 이르는 재원은 초과 세수와 세출 구조조정 등으로 마련하겠다고 했다. 현실성이 떨어진다는 지적과 함께 증세의 필요성이 제기됐다. 하지만 정부는 “사회적 합의가 필요한 증세를 추진하기에는 시간이 부족하다”며 중장기 과제로 넘겼다. 그리고 이듬해 4월 대통령 직속으로 재정개혁특별위원회가 만들어졌다. 재정개혁특위는 “국민 목소리를 최대한 수렴해 100년을 이어갈 수 있는 로드맵을 수립하겠다”고 밝혔다. 하지만 종합부동산세 강화 외엔 이렇다 할 결과물을 내놓지 못한 채 1년 시한의 활동을 마쳤다. 사실 종부세 강화는 증세 정책이라기보다는 부동산 대책의 성격이 강했다.
문재인 대통령이 지난 25일 ‘2020 국가재정전략회의’에서 코로나발 경제 위기 대응과 관련해 “전시 재정을 편성한다는 각오로 재정 역량을 총동원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문 대통령은 “불을 끌 때도 초기에 충분한 물을 부어야 더 큰 피해를 막을 수 있다”고 비유했다. 올바른 진단과 처방이다.
정부는 재원 마련 방안으로 세출 구조조정, 세외 수입 확보, 탈루소득 과세 강화 등을 제시했다. 이번에도 증세는 논의되지 않았다고 한다. 한 참석자는 “증세의 ㅈ자도 나오지 않았다”고 했다. 다음날 청와대는 공식적으로 “증세는 현실적으로 어렵다”고 밝혔다.
증세 없이 코로나발 경제 위기를 헤쳐나갈 수 있을까? 다행히 우리나라의 재정건전성이 상대적으로 양호해 당장 발등의 불은 끌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전국민 고용보험 확대 같은 사회안전망 강화는 항구적으로 재정을 투입해야 하는 과제다. 저출산·고령화에 대한 대비는 두말할 필요 없다. 계속 국채 발행을 통해 재원을 조달하는 방식은 지속 가능하지 않다. 또 이는 미래 세대에게 짐을 떠넘기는 일이다. 미래세대는 저출산·고령화의 충격을 직접적으로 받게 된다. 이들에게 국가 채무 부담까지 안겨줘선 안 된다.
국책연구기관들이 증세 논의를 본격적으로 시작해야 한다는 주장을 내놓기 시작했다. 정규철 한국개발연구원(KDI) 경제전망실장은 19일 ‘경제 전망 브리핑’에서 “재정 지출 확대 수요가 있는 만큼 그에 준해 재정 수입도 확대해야 한다”며 “중장기적으로 증세가 필요하다”고 말했다. 김유찬 한국조세재정연구원장은 26일 발간된 ‘재정 포럼’ 5월호에 실린 기고문에서 “현재와 같은 재난 시기에는 고통 분담이 필요하다는 사회적 인식하에 필요한 증세를 뒤로 미루지 말고 적절한 규모로 시행할 필요가 있다”고 밝혔다. 국제기구들도 같은 제안을 한다. 국제통화기금(IMF)은 지난달 내놓은 보고서에서 “코로나19로 취약계층이 더 큰 피해를 보고 있다”며 “소득과 부동산 등에 대한 세금을 인상하는 방안을 검토해야 한다”고 밝혔다.
코로나 사태를 겪으면서 ‘국가의 가치’가 새롭게 인식되고 있다. 우리나라가 코로나 방역에 성공하면서 정부가 국민의 안전을 지켜준다는 믿음이 확산되고 있다. 또 튼튼한 사회안전망이 꼭 필요하다는 생각도 늘어나고 있다. 동시에 긴급재난지원금과 긴급고용안정지원금 등이 지급되면서 재정 지출에 대한 효능감도 커지고 있다. 한국갤럽이 문재인 정부 출범 3년을 맞아 발표한 여론조사 결과를 보면, 주요 분야별 평가에서 복지 정책이 69%로 가장 높은 점수를 받았다. 보수 성향 응답자들도 복지에 대해선 긍정 평가가 51%로 부정 평가(38%)를 앞섰다. 증세를 통해 자신의 삶이 나아질 것이라고 믿는 사람이 늘어야 증세 문제를 사회적 논의에 부칠 수 있는데, 지금 그런 분위기가 조성되고 있는 것이다.
물론 증세는 넘어야 할 산이 많다. 증세에 대한 공감대가 형성된다 하더라도 ‘부자 증세’를 할지 ‘보편 증세’를 할지, 구체적으로 어느 세금을 얼마나 올릴지, 하나하나가 논쟁적 사안이다. 지금 논의를 시작해도 현실화하려면 최소 1~2년은 걸릴 것이다. 모처럼 찾아온 증세 공론화를 위한 ‘골든 타임’을 문재인 정부가 놓치지 말기 바란다.
안재승ㅣ논설위원실장 jsah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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