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한민 ㅣ 작가·시셰퍼드 활동가
“와닿지 않는다”는 말이 무기가 되었다. 독자, 관객, 시청자, 국민, 유권자의. 소통과 공감의 시대에 밀착형이 아닌 콘텐츠가 설 자리는 없다. 와닿지 않는다는 선고는 실패의 인증. 그 낙인이 찍힌 메시지가 있다면, 잘못은 메시지 자체 혹은 송신자에게 있다. 수신자가 틀리는 법은 없다. 손님이 왕이다. 왕들이 주머니를 열도록 ‘확 와닿게’ 메시지를 가공할 줄 아는 자 또한 왕이다. 핫이슈와 클릭수와 셀럽들이 견인하는 ‘주목경제’의 물결은, 낯설거나 장기적이거나 공부가 필요한 이야기들을 가시권 밖으로 밀어낸다. 아무리 중요하고 의미가 있어도.
전염병은 확 와닿는다. ‘전염병 위기’라는 수식도 필요 없다. 전국민이 ‘팬데믹’ ‘비말’ ‘KF94’ 같은 낯선 단어까지 외운다. 반면, 기후위기는 참 안 와닿는다. 위기를 강조하며 겁을 줘봐도, 탄소 배출부터 친절히 설명해봐도 반응은 한결같다. 그래 좋은 얘기지, 하지만 당장 나랑 무슨 상관이람?
사람이건 사회건 즉각적인 1차원적 메시지에만 반응하다 보면 1차원에 갇힌다. 1차원 중의 1차원이 ‘에고’이다. 이토록 ‘나’에 탐닉하기 좋은 세상이 있었던가? 나만의 채널 만들기, ‘나라는 브랜드’ 구축하기를 장려하는 사회의 승자는 당당하거나 귀여운 나르시시스트다. 꾸미고 가꾸고 찍고 뽐내라! 먹방, 운동 루틴, 브이로그…. 내용에 제약은 없다. 단, “시시한 걸 올릴 가치가 있을까?” 따위의 의심이나 성찰은 금물이다. ‘자뻑’은 심지어 정신건강에도 좋단다. 자존감 낮은 이들의 신종 치유책이란다. 성공한 자들의 장황한 자기 얘기를 듣노라면 과연 자기중심적 나르시시즘이 비결이구나 싶기도 하다. 자기애성 성격장애(narcissistic personality disorder)가 늘고 있으며, 나르시시즘은 환상에 기초하기에 깨지는 순간 기다리는 건 한없는 우울뿐이라는 충고는 무시당한다.
짬만 나면 셀카를 보는 이들, 애인과 찍은 사진 속에도 자기 얼굴에 눈이 가는 이들을 보면 궁금해진다. 자기애가 지겹지도 않을까? 천만에. 서로의 자아도취를 따뜻이 지지해주는 상부상조 덕분에 문제없다. 수만명의 팔로어를 거느렸다면 “거울아 거울아 누가 제일 예쁘지?” 묻기만 해도 좋아요와 하트 행렬이 이어지리라. 평범한 사람에게도 소소한 포스팅에 반응해주는 자상한 팔로어 한명은 있다. ‘우쭈쭈의 생태계’는 이렇게 보존된다.
사회학자 리처드 세넷은 <공적 인간의 몰락>에서 ‘나르시시스트적 규준’에 물든 사회는 스스로의 이미지를 거울에 비춰주는 사회 현상만 유의미하게 해석한다고 지적했다. 탈인간중심주의의 핵심 사상가 에두아르두 비베이루스 지 카스트루는 “안티 나르시스”라는 개념으로 나르시시즘에 빠진 기존의 인류학적 시선을 전복하려 한다. 타자(비서구)를 연구할 때조차 자기(서구)를 기준으로 한 인식에 그쳤다는 비판이다. ‘외국의 한국 칭찬’이 초미의 관심사인 우리의 외신 보도 경향도 집단적 나르시시즘의 징후이며, 자기애적 근시안에서 관심사가 손톱만큼 확장되는 드문 경우조차, 내 가족-내 새끼-내 종족의 자장을 벗어나지 못하는 변형된 나르시시즘이 대부분이다.
진짜 문제는 나르시시스트 인류가 믿어온 인간예외주의이다. 호모사피엔스만이 특별하고 우월한 종이라는 잘난 사상 덕분에 전례 없는 생태계 위기가 찾아왔다. 고로 나는 의심한다. 당신과 상관도 없는 연예인의 신변잡기는 와닿는데, 전지구적 생태 위기가 피부에 와닿지 않는다고? 그럼 당신의 피부가 문제다! 회복 불가능한 지구가열을 막아낼 시간이 겨우 10년 남았다고 기후학자들이 경고한 게 벌써 몇년째인데도, 와닿지 않는다고? 그럼 가닿으라! 기후위기가 말 그대로 피부에 와닿는 순간이 온다면 그땐 이미 게임 오버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