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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황제의 불안, 두려움의 정치

등록 2020-07-07 16:44수정 2020-09-15 19:59

박민희 시진핑시대 열전 _ 01

시진핑 시대 중국이 점점 더 개혁개방으로부터 멀어지면서 문화대혁명(문혁) 시대로 돌아가고 있다고 우려하는 이들이 적지 않다. 문혁의 소용돌이에서 성장한 시진핑의 통치에서 문혁의 영향과 트라우마가 어떻게 작용하고 있는지도 주목할 부분이다.​

2012년 11월15일 중국공산당 18차 당대회 마지막 날, 이제 막 공산당 총서기에 오른 시진핑이 베이징 인민대회당에 모인 내외신 기자들 앞에 처음으로 등장했다. 전세계의 관심이 중국 새 지도자에 집중된 가운데 그는 “오늘날 중화민족은 유례를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부흥하고 있다”고 선언했다. 2주 뒤에는 국가박물관을 찾아가 연설을 하면서 “중화민족의 위대한 부흥을 실현하는 것이 ‘중국몽’이다(…) 우리는 역사상 어느 때보다 중화민족의 위대한 부흥이라는 목표에 가까이 다가서 있다”고 했다.

당시 베이징 특파원으로서 이 세기의 행사를 취재하면서, 오만하게 보일 정도로 대담하고 자신만만한 시진핑의 모습에 깊은 인상을 받았다. ‘로봇’이란 별명으로 불린, 항상 정해진 틀 안에서 조심스럽기만 했던 전임자 후진타오의 통치와는 완전히 다른 새 시대가 펼쳐질 것이란 예감이었다.

2012년 말 시진핑이 최고 지도자로 등장했을 무렵 중국은 그야말로 ‘더 이상 예전의 길로는 계속 갈 수 없다’는 데 상하좌우가 공감하는 전환점에 서 있었다. 특파원으로서 중국 지도층의 부정부패와 천문학적인 축재, 치열한 권력투쟁에 대한 기사를 쉴 새 없이 썼다. 보시라이 충칭시 당서기가 시진핑을 후계자로 정한 당의 결정에 불복해 자신이 최고 지도자가 되려고 군대를 동원해 ‘정변’을 시도한 사건까지 벌어졌다. 강제철거, 환경오염에 저항하는 시위에 나선 이들, 파업에 나선 노동자들을 만나 이야기를 들었다. ‘중국이 어디로 가야 하는가’를 둘러싸고 벌어진 좌파-우파의 논쟁에 귀를 기울이며, 중국이 어떤 새로운 길로 가게 될지 무척 궁금했다.

8년이 흐른 지금,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은 21세기의 ‘시황제’로 불린다. 2018년 3월1일 전국인민대표대회에서 국가주석 임기 제한을 폐지하는 개헌안이 99.8%의 찬성으로 통과된 뒤, 시 주석이 ‘종신 집권’하려 한다는 우려와 비판이 계속된다.

필자는 ‘쇠락하는 제국’ 미국을 대신해 중국이 언젠가는 대안적 질서와 가치를 제시할 수 있을 것이란 기대를 품고, 오랫동안 중국을 취재해왔다. 시진핑 시대 중국이 점점 강압적으로 변하는 모습을 보며 곤혹스러웠다. 한반도와 동아시아 평화를 위한 한-중 협력이 절실한 상황인데, 중국에 대한 실망감이 한국의 외교·안보 선택지마저 좁히고 있다. 한국 사회에서 ‘혐중’의 목소리는 넓고 깊게 퍼지고 있다. ‘혐중’은 중국의 현실을 제대로 이해하는 것을 막고, 중국 내부의 다양한 목소리와 고민에 대한 관심까지 차단하는 위험한 현상이다. ‘혐중’을 넘어 중국과 협력은 넓히되 비판할 부분은 비판하고 연대할 부분은 연대하려는 노력을 멈추지 말아야 한다. 14억 중국인들의 각양각색 고민과 목소리에 귀 기울여야 한다. 시진핑 시대, 중국 사람들의 이야기를 통해, 중국의 현재를 이해할 실마리를 찾아보려 한다. 감히 ‘시진핑 시대 열전’이라는 제목을 붙여보았다.

우선 시진핑 주석에서 시작하려 한다. 시 주석은 어떻게 덩샤오핑이 1인 권력 체제를 제한하기 위해 설정한 정치 규칙들을 무너뜨리며 ‘마오쩌둥 이후 가장 강력한 중국 지도자’로 떠오를 수 있었나.

‘시진핑 시대’의 첫 장면으로 다시 돌아가 본다. 그는 ‘중국몽’과 ‘중화민족의 위대한 부흥’이란 비전을 내놓으며 자신만만한 지도자로 등장했지만, 공산당 내부를 향해 발신한 메시지는 전혀 달랐다. 2012년 12월 첫 지방시찰로 광둥성을 찾아 연 당 내부 회의에서 그는 “왜 소련이 해체됐는가? 소련공산당은 왜 붕괴했는가?”라는 질문을 던졌다. “이념과 신념이 흔들렸기 때문이다. 정치적 부패와 이단적 이데올로기, 군부의 불충성이 지배당의 붕괴를 가져왔다. (…) 그리고 고르바초프의 조용한 말 한마디와 함께 그 위대한 당은 역사 속으로 사라지고 말았다. 결국 아무도 저항하려 나서지 않았다.” 시진핑은 이렇게 말했다고 전해진다.

시진핑 리더십은 처음부터 외부로는 강력한 자신감, 내부로는 불안감의 두 얼굴로 등장했다. 시진핑은 권력을 잡은 직후부터 공산당 지도부를 향해 당이 처한 불안한 상황에 대한 위기감을 강조했고, 자신이 그 위기를 돌파할 비전을 가진 위대한 지도자임을 강조하며, ‘시진핑 1인 체제’에 대한 합의를 만들어왔다.

취임 초기 시진핑이 최우선 과제로 추진한 것은 강력한 ‘부패와의 전쟁’이었다. 시 주석이 ‘호랑이부터 파리까지’(고관부터 하위직까지) 부패 관리들을 과감하게 숙청하자 대중들은 열광했다. 저우융캉 전 정치국 상무위원을 비롯해 당, 군, 국유기업, 민영기업 경영자, 중국 최초의 인터폴 총재까지 가리지 않고 수만명이 부패 혐의로 낙마해 처벌 받았다. ‘공포 정치’는 후진타오 시대에 지도자의 ‘영이 서지 않던’ 상황을 일거에 바꿨고 당의 권위를 강화했다. 아울러 경쟁 정치세력에 속한 고위 관리들을 대거 제거하고 그 자리에 ‘시자쥔’ ‘즈장신쥔’ 등으로 불리는 측근 세력들을 진입시켜 권력을 신속하게 강화했다.

단기간에 권력을 집중시킨 시진핑에 대해 공산당은 공식적으로 ‘핵심’이란 호칭을 붙였다. 마오쩌둥을 연상케 하는 인민영수, 총사령관 등의 호칭도 등장했다. ‘시진핑 신시대 중국 특색 사회주의 사상’이 당헌과 헌법에 명시됐다. 국가주석 임기 제한도 없앴다. ‘학습강국’(‘시진핑을 배우는’ 강국으로도 해석된다)이란 휴대폰 앱을 통해 시진핑 사상을 의무적으로 학습하는 캠페인도 벌어졌다. 문화대혁명 시기 ‘마오쩌둥 어록’이 21세기 첨단기술 버전으로 되살아난 셈이다.

왜 중국공산당 지도부와 엘리트들은 이에 동의한 것일까? 물론 ‘부패와의 전쟁’으로 당내 다른 파벌들의 영향력이 약화된 점도 고려해야 할 것이다. 하지만 시진핑의 권력 강화가 공산당이 권력을 잃고 소련공산당의 전철을 밟을 가능성, 중국이 혼란에 빠질 가능성을 차단하기 위해서는 권력을 집중할 필요성이 있다고 판단한 공산당 지도부의 위협 의식이 빚어낸 합의의 산물이라는 해석이 설득력이 있어 보인다. 손인주 서울대 정치외교학부 교수는 시진핑 시대의 중국을 “두려움의 정치”로 설명한다. 시진핑 1인 권력의 강화는 그의 권력욕 같은 개인적 요소보다는 통치 엘리트들의 집단적 위협 의식에 기반하고 있다는 것이다. “자신감보다는 두려움이, 공격적 본능보다는 방어적 본능이 시진핑으로의 빠른 권력 집중과 공산당의 영도 강화를 추동했다”는 해석이다. 손 교수는 또 중국 지도부의 위협 의식은 권위주의 체제 자체가 지닌 구조적 문제로부터 발생했다고 설명한다. “지배연합으로부터 배제된 대중과의 갈등과 지배연합 내부의 권력 갈등이 엘리트들이 느끼는 위협 의식의 뿌리였다”는 것이다.

개혁개방 40년 동안 중국은 세계 2위의 경제대국으로 부상했지만, 부는 불공정하고 불평등하게 분배되었다. 기득권층에 대한 대중의 분노는 커졌다. 기득권층의 이익을 제어하고 공정한 부의 재분배를 실현할 개혁이 필요했고 시진핑이 이런 개혁을 해낼 것이란 기대도 컸다. 하지만 점점 개혁보다는, 대중의 불만을 통제하고 억누르는 쪽으로 기울었다. 2012년 권력 교체기에 일어난 ‘보시라이 사건’도 지도부의 불안감을 고조시키면서 권력 집중에 대한 필요성을 뒷받침했다.

서구 자유주의가 중국 공산당의 일당통치를 위협한다는 해묵은 두려움도 커졌다. 중국 지도부는 오랫동안 서구가 지원하는 색깔혁명(동유럽, 중동에서 일어났던 비폭력 민중시위)이 중국 공산당 통치를 위협할 것으로 두려워했는데, 시진핑 시대 들어서는 서구 민주주의를 비롯한 서구의 사상과 이념 전체를 차단하려는 움직임으로 이어졌다.

이런 현상들이 쌓이면서, 시진핑 시대 중국이 점점 더 개혁개방으로부터 멀어지면서 문화대혁명(문혁) 시대로 돌아가고 있다고 우려하는 이들이 적지 않다. 문혁의 소용돌이에서 성장한 시진핑의 통치에서 문혁의 영향과 트라우마가 어떻게 작용하고 있는지도 주목할 부분이다.

1953년 중국 혁명 원로인 시중쉰 전 부총리의 2남2녀중 셋째로 태어난 시진핑은 지도자들이 모여사는 중난하이에서 저우언라이 총리를 “아저씨”라 부르며 도련님의 어린시절을 보냈다. 시진핑이 9살 되던 1962년 당시 부총리였던 시중쉰은 나중에 모함으로 판명된 류즈단 반당 음모 사건에 연루돼 모든 직위를 잃고 공장 노동자로 보내졌다. 온 가족은 ‘반당분자의 가족’으로 전락했다. 시진핑은 문혁이 시작된 지 1년 뒤인 1969년부터 중국 서북지역 산시성의 산간벽지 량자허에서 고된 노동을 하며 7년을 보냈다. 그는 10번 거절을 당한 끝에 결국 공산당에 입당했고, 문혁 후기인 1975년 칭화대에 입학했다. 아버지의 복권 뒤 군대를 거쳐 정치가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 그는 문혁 시대 농촌으로 ‘하방’됐던 경험을 중요한 정치적 자산으로 삼고 있다. “15살에 (산시성 량자허의) 황토고원에 도착했을 때 나는 초조하고 혼란스러웠다. 22살에 황토고원을 떠날 때 삶의 목표는 굳건해졌고 자신감으로 가득 차 있었다”고 회고했다.

빈부 격차를 원망하는 중국인들 사이에서 마오쩌둥 시기의 평등에 대한 향수가 커지는 가운데 시진핑은 마오쩌둥의 이미지를 빌려 공산당의 이상주의적 뿌리를 회복시키고 외세에 단호히 맞서는 강력한 지도자상을 구축해왔다. 한편으로는 노동자와 농민, 학생들이 ‘21세기 홍위병’이 되어 아래로부터 ‘반란’을 일으킬 가능성을 두려워하는 ‘문혁 트라우마’가 그의 통치에 깊이 도사리고 있다. 인권운동가들과 변호사들, 소수민족, 농민공(농민 호구를 가진 노동자)들이 아래로부터 변화를 요구하려는 움직임을 철저하게 탄압한다. 중국 전역에 설치된 감시카메라(CCTV), 생체정보 수집, 인터넷 검열로 14억의 생각과 움직임을 감시·통제하는 ‘디지털 빅브러더’ 사회에 대한 공포가 커지고 있다.

베이징의 한 학자는 익명을 전제로 현재 중국의 상황에 비관적인 평가를 내놨다. “덩샤오핑 시대에는 광활한 중국의 복잡한 상황 속에서 인민들에게 일정 정도 자유로운 공간을 보장해 인민과 지방의 적극성과 열정을 동원했다. 시진핑 시대에는 지도자와 당이 이미 진리를 모두 장악했으니 인민들은 당과 지도자를 신앙하며 따르기만 한다는 식으로 변했다. 인민들의 탐색 공간도, 언론의 자유도 주어지지 않는다.”

시진핑에게는 다른 선택지도 있었다. 공산당 내에서 개혁을 모색하는 목소리들, 더 나은 삶과 공정함을 요구하는 노동자, 농민들의 에너지를 포용적으로 수용하면서 새로운 ‘중국의 길’을 만들어갈 여지도 있었다. 트럼프의 ‘미국 난장극’을 마주하고 있는 전세계에도 ‘중국 모델’은 훨씬 매력적인 대안이 될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불안과 두려움에 사로잡힌 권력은 그 길을 선택하지 못했다.

박민희 논설위원 minggu@hani.co.kr

박민희 | 대학과 대학원에서 중국과 중앙아시아 역사를 공부했다. 중국 런민대학에서 국제관계를 공부한 뒤, 2009년부터 2013년까지 <한겨레> 베이징 특파원으로 중국 곳곳을 다니며 취재했다. <중국을 인터뷰하다>(공저)를 썼고, <중국과 이란> 등의 책을 번역했다. ‘혐중’에 반대한다. 중국과 중국인에 대한 공정한 이해와 동행을 희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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