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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백기철 칼럼] ‘미투혁명’으로 가는 길

등록 2020-07-15 18:10수정 2020-07-17 16:11

박원순의 죽음은 ‘미투혁명’으로 가는 길에 놓인 슬픈 역사인지 모른다. 최근 젠더 문제에 대한 대중적 분출은 우리 사회가 더 이상 여성 차별 사회에 머물기 어려운 비등점에 있음을 보여준다. 젠더 문제를 풀지 않고서는 불평등, 권위주의, 갑질도 해결할 수 없다. 기업이나 나라가 제대로 서려면 여성의 지위와 역할이 실질적으로 보장돼야 한다.

13일 서울 은평구 한국여성의전화 교육관에서 열린 '서울시장에 의한 위력 성추행 사건 기자회견'에서 김재련 법무법인 온-세상 대표변호사가 발언하고 있다. 공동취재사진
13일 서울 은평구 한국여성의전화 교육관에서 열린 '서울시장에 의한 위력 성추행 사건 기자회견'에서 김재련 법무법인 온-세상 대표변호사가 발언하고 있다. 공동취재사진

박원순 서울시장의 비극적 죽음을 보며 한 시대가 저물어가고 있다고 말하는 이들이 많다. 한 시대의 마감은 또 다른 시대를 예고한다. 다소 섣부르지만 ‘박원순 시대’가 끝나가면서 우리 사회는 이른바 ‘미투혁명’의 한복판으로 들어서고 있다.

박원순을 둘러싼 성추행 의혹 사건의 실체는 명확히 규명돼야 하지만, 그의 충격적 죽음만으로도 직장 내 성폭력 문제의 심각성을 짐작하고도 남음이 있다. 앞서 안희정, 오거돈의 성폭력 사건에서 보았듯 우리 사회는 여전히 전근대적인 여성 억압 사회에 머물고 있다.

혁명은 개인들의 비극이 켜켜이 쌓여 굴러가는 역사의 수레바퀴와 같다. 박원순의 죽음 역시 미투혁명으로 가는 길에 놓인 슬픈 역사인지 모른다. 박 시장 죽음을 두고 책임 회피라고 비판할 수 있지만 죽음의 무게를 그리 가벼이 볼 일만은 아니다. 그의 이름에 걸맞게 공정하고도 엄정하게 사건을 마무리해야 한다.

사건 피해자는 박 시장의 극단적 선택으로 이중적 피해를 겪고 있다는 점에서 고통의 정도는 더욱 크다. 그의 고통을 덜어주고 아픔을 치유하는 게 급선무다. 더도 말고 덜도 말고 통상의 권력형 성폭력 사건과 동일한 잣대로 다루면서 피해자 중심주의 원칙을 견지해야 한다.

최근 우리 사회의 미투 물결은 급격한 대중적 분출 양상을 띤다. 강남역 시위, 혜화역 시위, 엔번방 사건에 대한 분노, 아동 성착취물 사이트 운영자의 미국 송환 불허에 대한 거센 반발 등 어느 것 하나 가벼이 넘길 수 없을 만큼 폭발적이다. 젠더 문제에 대한 대중적 분출은 한국 사회가 더 이상 여성 차별 사회에 머물기 어려운 비등점에 다다르고 있음을 보여준다.

젠더 문제는 이제 주변 이슈가 아니다. 격차 문제와 함께 젠더는 가장 첨예하고 민감한 이슈다. 젠더 문제는 우리 사회의 모든 영역을 관통한다. 정치, 기업, 가정, 문화, 미래 등 주요 영역에서 젠더가 메인 이슈가 아닌 곳이 없다. 젠더 문제를 제대로 풀지 않고서는 불평등, 권위주의, 갑질 문제도 해결할 수 없다.

특히 정치 분야의 성평등은 매우 시급하다. 상대적으로 진보적이라고 간주되는 더불어민주당에서 미투 사건이 잇따르는 건 그만큼 우리 정치가 후진적이라는 걸 보여준다.

정치권에선 이제야 여성 국회 부의장이 처음 나왔고, 앞서 여성 대통령이 나왔지만 젠더적 관점에서 유의미한 일은 없었다. 국회의원의 여성 비율은 여전히 20%를 밑돌며 횡보하고 있고, 여태껏 광역단체장 중 여성은 한 명도 없었다. 전국의 기초자치단체장 226명 중 여성은 8명에 불과하다. 국민 생활과 직결된 자치단체장들이 대부분 남성이라는 건 밑바탕이 되는 생활자치에서부터 성평등이 이뤄지지 않고 있다는 이야기다.

차기 서울시장, 부산시장은 여성이 맡는다고 생각하면 어떤가. 최소한 민주당은 내년 봄에 치러질 서울시장, 부산시장 선거에서 후보를 낼 경우 여성 후보를 우선적으로 검토하는 게 좋을 것 같다. 정당들은 여성의 정치권 진입 장벽을 더욱 낮추고, 선출직의 절반은 여성을 공천한다는 목표로 자원을 백방으로 물색해야 한다. 광역·기초단체장과 국회의원 등 정치의 핵심 영역에서 여성이 실질적으로 절반에 다가서는 사회로 가야 한다.

미투혁명은 직장 등 모든 사회 영역에서 여성 지위의 폭발적 도약으로 가는 길이다. 여성들이 각자 위치에서 분투하고 연대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여성이 주요 분야의 핵심적 위치로 올라서야 한다. 다소 과격하게라도 법제화, 규범화를 서둘러야 한다.

우리 사회는 이제 젠더적 관점 없이는 어느 것 하나 설명하기 어렵게 되어가고 있다. 대부분의 핵심 사안은 젠더적 관점을 통해 접근하고 해석해야 제자리를 찾을 수 있다. 무슨 회의나 주요 사안을 논의할 때 여성이 배제되면 균형을 잃기 십상이다. 기업이나 나라가 제대로 서려면 여성의 지위와 역할이 실질적으로 보장돼야 한다.

박원순의 경우 말년에 큰 과가 있었지만 그래도 공이 적지 않다고 생각한다. 진보 진영에서 무언가를 새로 시작해 이루는 것, 창의적으로 접근해 괜찮은 결과물을 만들어내는 데에는 여태껏 박원순만한 이가 없었다. ‘입 진보’, ‘반대만 하는 진보’가 많던 시대에 박원순은 일하는 진보, 결과를 일궈내는 진보, 창의적인 진보를 실천한 인물이었다. 다만, 안타까운 일이지만 제기된 성추행 의혹이 사실이라면 그의 이런 모든 업적도 결과적으로 빛이 바랠 수밖에 없다.

백기철 ㅣ 편집인
kcbaek@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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