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광고

광고닫기

광고

본문

광고

오피니언 칼럼

[전범선의 풀무질] 설악이 왈

등록 2020-07-26 16:24수정 2021-04-04 17:17

전범선 ㅣ 가수·밴드 ‘양반들’ 리더

설악이는 개다. 작년, 천안의 도살장에서 구출됐다. 발가락이 하나 없었고, 다리뼈가 드러나 있었다. 설악이는 원래 고기가 될 운명이었다. 매년 백만 마리의 개들이 그렇게 짧고 고통스러운 생을 마감한다. 설악이는 운이 좋았다. 다섯번의 수술을 거쳐 되살아났다. 가족도 생겼다. 이제는 여느 반려견처럼 산책도 하고, 간식도 먹고, 재롱도 부리며 산다.

지난 수요일, 복날을 앞두고 설악이가 청와대에 갔다. 문재인 대통령에게 편지를 전했다. 개 도살 금지를 촉구하는 공개서한에는 국내외 인사들의 서명과 함께 설악이의 발도장도 찍혀 있었다. 편지 내용을 이해시키고 지장을 찍은 것은 아니다. 그러나 개농장에 남은 동족을 살려달라는 목소리에 설악이도 공감하리라 믿는다. 말 못 하는 동물도 눈빛을 보면 무엇을 원하는지 알 수 있다. 도살장에서 발견된 설악이는 조용히 외치고 있었다. “살려주세요.” 남자만 보면 무서워서 벌벌 떨더니 청와대 앞에서는 경찰 아저씨가 만져도 짖지 않았다. 대견했다. 죽어가는 개들을 대표하는 걸 알기나 할까.

청와대 안에는 문재인 대통령의 반려견 토리가 살고 있다. 설악이와 토리는 무엇이 다를까. 왜 하나는 고기가 될 뻔했고, 하나는 ‘퍼스트 도그’가 되었을까. 대한민국에서 개식용 산업의 울타리 안팎은 천지 차이다. 이름이 있고 없고의 차이이기도 하다. 설악이는 생지옥에서 살아남았기 때문에 이름을 얻었다. 그래서 내가 기억하고, 기록한다. 하지만 이름도 없이 사라지는 개들이 수없이 많다. 모두 설악이가 될 수 있었다. 행복할 수 있었고, 행복하고 싶었지만, 입맛과 미신을 위해 학살된 설악이들.

설악이와 토리, 식용견과 반려견, 개고기 산업 안과 밖은 생사의 경계다. 하지만 그 경계는 모호하다. 사실 토리는 유기견 출신이다. 토리 같은 유기견, 반려견이 농장에 넘어가기도 하고, 설악이 같은 농장 개가 반려견이 되기도 한다. 먹기 위한 견종, 사랑하기 위한 견종이 따로 있지 않다. 인종차별만큼 견종차별도 임의적이고 모순적이다.

반려동물 인구가 1500만명에 육박하는 대한민국은 세계 유일의 개식용 산업국이다. 개는 법적으로 반려동물이자 가축이다. 하지만 축산물위생관리법에는 빠져 있다. 난장판이다. 동물보호법상 개를 “잔인하게” 죽이면 안 된다. 가축이기 때문에 농장에서 기를 수는 있지만, 식품이 아니기 때문에 적법한 도축 과정이 없다. “개 패듯이” 때려 죽이고, 목 졸라 죽이는 것은 모두 동물보호법 위반이다. 올해 대법원은 전기도살도 위법이라고 판결했다. 이제 사실상 합법적인 식용 개 도살은 없다. 정부가 규제할 의지가 없기 때문에 개식용 산업이 존속한다.

청와대는 국민적 합의가 우선이라며 회피한다. 합의하자. 개는 가축인가 반려동물인가? 하나만 하자. 둘 다일 수는 없다. 육견협회가 바라는 대로 개를 소, 돼지, 닭처럼 축산물로 관리할 수도 있다. 그러면 반려인들이 가만있지 않을 것이다. 반대로 개를 가축 목록에서 삭제하고 반려동물로 지위를 통일할 수 있다.

개만 먹지 말자는 게 아니다. 개부터라도 먹지 말자는 것이다. 설악이와 함께 청와대로 간 시민들은 거의 채식주의자다. 설악이와 토리가 같다면, 개, 돼지, 소, 닭도 같다. 동물권 운동의 최대 과제는 동물에 대한 인지 부조화를 없애는 것이다. 사람들은 대부분 동물을 좋아하지만 동물을 먹는 것도 좋아한다. 식탁 위의 고기가 이름 있는 개별적 실체로 다가오지 않기 때문이다. 개에 대해서는 한국인의 인지 부조화가 극심해져서 국가가 아예 법적으로 일관되기를 포기했다.

다시 한번, 설악이가 토리의 반려인 문재인 대통령에게 묻는다. 나는 당신의 친구입니까 고기입니까? 당신이 사랑하는 토리와 나는 무엇이 다릅니까?
항상 시민과 함께하겠습니다. 한겨레 구독신청 하기
언론 자유를 위해, 국민의 알 권리를 위해
한겨레 저널리즘을 후원해주세요

광고

광고

광고

오피니언 많이 보는 기사

국힘은 왜 ‘내란’에 끌려다니나 [2월10일 뉴스뷰리핑] 1.

국힘은 왜 ‘내란’에 끌려다니나 [2월10일 뉴스뷰리핑]

윤석열을 믿어봤다 [한겨레 프리즘] 2.

윤석열을 믿어봤다 [한겨레 프리즘]

‘개소리’ 정치학 [유레카] 3.

‘개소리’ 정치학 [유레카]

[사설] ‘내란 수사 대상자’ 서울경찰청장 발령 강행한 최상목 4.

[사설] ‘내란 수사 대상자’ 서울경찰청장 발령 강행한 최상목

[사설] ‘내란 음모론’ 힘 싣는 국힘, 그러면 계엄이 없던 일 되나 5.

[사설] ‘내란 음모론’ 힘 싣는 국힘, 그러면 계엄이 없던 일 되나

한겨레와 친구하기

1/ 2/ 3


서비스 전체보기

전체
정치
사회
전국
경제
국제
문화
스포츠
미래과학
애니멀피플
기후변화&
휴심정
오피니언
만화 | ESC | 한겨레S | 연재 | 이슈 | 함께하는교육 | HERI 이슈 | 서울&
포토
한겨레TV
뉴스서비스
매거진

맨위로
뉴스레터, 올해 가장 잘한 일 구독신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