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정윤 ㅣ 국제부장
한국 국제부 기자의 최대 단점과 장점은 포개진다. 아무리 매섭게 기사를 써도 국제정세에 별 영향을 못 미치니 기사 쓰는 일이 허탈할 때가 있다. 대신 아무리 세게, 가령 트럼프를 비판해도 트럼프나 지지자들로부터 ‘기레기’로 분리수거당할 일은 없으니 완전한 언론의 자유가 보장된다.
그럼에도 국제부가 어떤 기사를 쓸지 결정하는 과정에서 ‘매일’ 미국 기사, 특히 트럼프 기사를 빼려고 무던히 애쓴다. 일주일에 한 두번은 ‘통상적인 기사 판단’에서 벗어나는 결정인 줄 알면서도(다른 신문이 다 쓰는데 <한겨레>만 안 쓰게 될 줄 알면서도) ‘다른 판단’으로 트럼프 기사를 뺀다. 아무리 덜어내려 노력해도 늘 너무 많기 때문이다.
큰 국제 이슈가 없는 날은 더욱 그렇다. 어제 국제면(29일치 14면)도 그랬다. 기사 네 꼭지가 지면에 실렸다. △‘재선 먹구름’ 초조한 트럼프, ‘역전’ 노리며 백신 개발 재촉 △추락하는 ‘팍스 아메리카나’ △미·중 서로 ‘희소자원 독립’ 잰걸음 △나집 전 말레이 총리 국고횡령 유죄였다. 미국 관련 기사가 셋이나 되지만 그나마 자기검열 끝에 미국 기사 하나를 억지로 뺀 결과다. 한국 독자들이 말레이시아의 전 총리 부패 기사에 관심이 있을지 자신이 없었다. 차라리 디지털로 쓴 △트럼프, 국가안보보좌관 코로나19 확진에 “최근 본 일 없어” 혹은 △코로나 뉴노멀…구글, 재택근무 내년 6월말까지 허용 등 미국 기사를 넣으면 독자들이 눈여겨볼 듯도 싶었다. 하지만 ‘국제면’이 ‘미국면’이 되는 걸 막으려면 별수 없었다.
이렇게 매일 신경 써도 티는 안 난다. 지난 13일 <한겨레> 열린편집위원회에서도 예상대로 ‘따끔’한 지적을 받았다. 국제기사에 대한 호평도 많았지만, 박영흠 협성대 미디어영상광고학과 초빙교수의 비판에 고개를 끄덕였다. “(한겨레가) 미국 중심의 패권 질서에 비판적인 시각을 가지고, 제3세계에 관심을 두고 꾸준히 기사를 썼지만 여전히 미국 보도 비중이 높다. 사실상 도널드 트럼프 미 대통령 중심의 보도로 보인다.”
“2020년 상반기, 언론이 가장 많이 인용한 인물 ‘도널드 트럼프’” 22일치 <기자협회보> 1면 머리기사도 국제부 기자라면 한번쯤 숙고해볼 수밖에 없는 내용이다. 1~6월 한국언론진흥재단 뉴스 빅데이터 분석 시스템 ‘빅카인즈’를 분석해보니, 54개 언론사가 가장 많이 인용한 인물은 문재인 대통령(1만996번)도 아닌 트럼프(1만4404번)였다. 이른바 ‘따옴표 저널리즘’을 비판한 기사였는데, 한국 언론이 문 대통령보다 트럼프를 더 많이 인용했으리라곤 예상 못 했다.
버락 오바마 전 미국 대통령의 말은, 그저 ‘말’뿐이었어도 더 나은 세상을 가리키는 메시지라도 있었다. 입만 열면 미국과 지구촌의 분열을 부추기고, 근거 없는 가짜뉴스로 세상을 불안케 하는 트럼프의 말은 안 듣고 안 볼 수 있으면 기자들도 무시하고 싶다. 하지만 트럼프 한마디에 한반도가 출렁이고, 미국과 중국이 충돌하고, 국제조약이 휴지 조각으로 변한다. ‘팍스 아메리카나’가 추락하고 있어도 아직은 가공할 미국 대통령의 힘을 도외시할 수 없을 뿐이다.
불가피하게 트럼프를 쓰더라도, 그 말이 기사에서 제멋대로 춤추지 않게 하려고 ‘가드레일’을 설치하는 일에는 늘 신경을 곤두세운다. 가령 트럼프가 “한국·러시아를 포함한 G7 확대 개편”을 말할 때, <한겨레>는 ‘기존 G7 회원국이 러시아 재가입을 반대하고, 러시아가 합류해도 미국 의도대로 반중연대 틀로 나가기는 힘들다’는 점을 함께 짚었다. 이후 영국과 캐나다, 일본에 이어 독일도 확대 개편에 반대하는 입장을 공개 천명했다.
미국 중심의 보도를 넘어서는 좀 더 근본적인 과제는, 항상 노력하지만 쉽지 않다. 국제부 기자가 적은데, 기자들이 쓰는 외국어가 영어, 중국어, 일어 정도로 겹친다. 주로 영미권 기자들이 쓴 기사를 ‘원전’으로 의지하게 된다. 특히 제3세계 관련 외신은 독재·내전·부패·성차별·빈곤·질병 등 본의 아니게 그곳을 낮추어 보도록 안내하는 기사가 많다. 제3세계에 대한 다층적 이해를 돕는 훌륭한 원전이 많지 않다. 그럼에도, ‘완전한 언론 자유’의 책임이 미국 너머 세상에도 있음을 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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