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종 코로나에 관한 비관적인 예측과 근거 없는 낙관론이 어지럽게 교차하는 가운데 어느 쪽을 믿어야 할지 알 수 없다. 자기 인생은 차치하고 인류 전체의 내일이 생각하면 할수록 보이지 않는다. 그런 상황에서 D군은 굳이 “마음이 설렌다”고 말한다. 가까스로 불안을 다스리면서 정신의 평형을 유지하고 있는 게 아닐까. 그래서 ‘애달픈’ 것이다.
히에로니무스 보스의 <쾌락의 정원>. 최재혁(예술도서 번역·기획편집)씨 제공
서경식|도쿄경제대 교수, 번역 한승동(독서인)
한국 사정은 어떤지 잘 모르겠으나, 일본에서는 지금부터 신종 코로나 재앙이 본격적으로 덮쳐올 것이다. 7월23일 기준 도쿄에서는 감염자 수가 360명을 넘어 지금까지 최대치를 기록했다. 오사카에서도 100명을 넘었다. 앞날을 가늠할 수 없는 바이러스와의 싸움은 앞으로도 오래 이어질 것이다.
그러나 내가 여기서 ‘일본형 디스토피아’라고 부르는 것은 코로나 재앙 자체가 아니라 그것이 초래한 다양한 부조리(실로 부조리극을 보는 것 같은)를 가리킨다. 예컨대 이런 감염이 만연하는 현실에서, 일본 정부는 많은 비판을 무시하고 거액의 국비를 들여 ‘고 투’(Go To)라는 여행진흥책을 강행했다.
아베 총리는 7월22일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대책본부 회의에서 내년 여름의 도쿄올림픽을 예정대로 열겠다는 ‘불퇴전의 결의’를 밝혔다. 일본 국내 여론조사에서도 80% 정도가 올림픽 ‘중지’ 또는 ‘재연기’가 바람직하다고 응답했는데도 그랬다. 현실성 없는 정책의 강행으로 또다시 사람들이 큰 희생을 당하게 될 것이다.
예전에 전후 일본을 대표한 지식인 가토 슈이치씨는 그런 일본을 브레이크 없는 자동차에 비유했다. 비탈길을 곧바로 가고 있을 때는 순조로워 보이지만 도중에 방향을 바꿀 수도, 정지할 수도 없다는 의미다. 이것은 지난날 전쟁을 향해 돌진한 일본에 대한 얘기지만, 지금도 그런 특징은 바뀌지 않은 것 같다. 뻔히 알면서도 파국을 향해 돌진하는 이런 ‘부조리극’을 나는 ‘일본형 디스토피아’라고 부른다.
익숙하지 않은 온라인 강의를 계속한 끝에 마침내 1학기 종강을 맞았다. 그동안 학생들 얼굴을 끝내 한 번도 대면하지 못했다. 틀림없이 스트레스가 쌓여 있을 것이다. 그래도 학생들은 요청한 대로 성실하게 리포트를 송신해주고 있다. 그중에서 예술학 수업반에 속해 있는 학생(D라고 해두자)의 리포트가 눈길을 끌었다. 학생의 허락을 받아 앞부분을 소개한다.
“이 디스토피아적 세상 속에서 나는 왠지 마음이 설렌다. 영화든 뭐든 너무 많이 봐서 그런지도 모르겠지만, 드디어 내게 ‘세계의 종말과 하드보일드 원더랜드(비정하고 불가사의의 나라)’가 막을 연 것이다. 세계의 종말은 어느새 거기까지 와 있다. 코로나 백신이 개발되기 전에 거대한 지진이 일어나 일본열도가 침몰할지도 모르고, 아니면 전쟁이 일어나 지구상의 모든 것들이 파괴될지도 모른다.”
사람들이 불안에 사로잡힌 채 병들어 죽어가고 있는 이런 상황에서 이런 감상을 소개하는 것은 어쩌면 일부 사람들로부터 오해를 사, 신중하지 못한 처사라고 질책을 당할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오히려 어쩐지 애달프다는 생각이 든다. “자네의 기분을 잘 알겠네”라고 말해주고 싶어진다.
바로 ‘디스토피아적 세상 속’에 내던져진 채 친구와 놀 수도 없고 대학 구내에 들어갈 수도 없어서, 믿고 의지할 데라고는 인터넷뿐인 매우 고립된 상태 속에 지난 몇 달을 보냈다. 취직도 아직 결정된 게 없다. 신종 코로나에 관한 비관적인 예측과 근거 없는 낙관론이 어지럽게 교차하는 가운데 어느 쪽을 믿어야 할지 알 수 없다. 자기 인생은 차치하고 인류 전체의 내일이 생각하면 할수록 보이지 않는다. 그런 상황에서 D군은 굳이 “마음이 설렌다”고 말한다. 나는 그 심정을 이해할 수 있다. 그렇게 해서 그는 가까스로 불안을 다스리면서 정신의 평형을 유지하고 있는 게 아닐까. 그래서 ‘애달픈’ 것이다.
예술을 가르친다는 것은 예술에 관한 지식이나 정보를 주는 게 아니다. 대상과 조우하면서 놀라거나, 슬퍼하거나, 분노하거나, 기뻐하는 감성을 불러일으키는 것이다. 그것이 어떻게 가능할지 시행착오를 거듭해왔는데, 거기에 코로나 재앙까지 덮쳤다. 대면수업은 불가능하고 많은 미술관이나 영화관도 폐쇄됐다. 학생들과 직접 얼굴을 마주하면서 예술작품을 함께 감상하고, 소감이나 의견을 서로 얘기할 수 없게 됐다. 이런 식으로 ‘예술’을 교육할 수 있는 것일까? 어느 동료 교수(소설가)가 교육에는 ‘육감’과 ‘육성’이 필요하다고 역설했는데, 정말 그렇다.
하지만 나는 D군의 리포트로 다소 위로를 받았다. D군은 앞서 얘기한 글을 계속해서 이렇게 써 나갔다. “만일 내일이 이 세상의 끝이어서 남은 24시간을 좋아하는 것에 써도 된다면 이탈리아 여행을 하고 싶다. 그리고 미술관에 가서 르네상스기의 정열적인 작품들을 기억 속에 담아두고 싶다.”
여기에서 ‘예술의 힘’을 느낀다고 하면 과장일까? 정말로 코로나 재앙이 끝나 세계가 평화로워지고 취직도 돼서 이탈리아에 여행을 갈 수 있게 된다면, 그리고 도판이나 영상만으로 친숙해진 보티첼리, 라파엘로, 미켈란젤로, 다빈치 등의 실물을 만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내일이 이 세상의 끝이라면’이라는 조건부로 얘기하고 있는 것이 오히려 그 바람이 그에겐 너무 먼 것이라는 얘기여서 참으로 애달픈 것이다.
약 반세기 전에 나도 앞을 볼 수 없는 한 사람의 고립된 젊은이였다. 내 경우는 브뤼헐이나 보스 등 북방 르네상스로 일컬어지는 예술가들에게도 매료돼 있었다. 그들을 실제로 내 눈으로 보고 싶다고 얼마나 애를 태웠는지 모른다. 만나는 사람마다 기회만 있으면 나의 그 동경을 얘기하기도 했다.
당시 국회의원 비서를 하고 있던 친절한 여성이 있었는데, 어느 날 나의 동경을 알고 있던 그가 스페인 여행에서 돌아와 “당신도 언젠가 꼭 갈 수 있을 거예요”라고 격려하면서 히에로니무스 보스(1450 무렵~1516)의 <쾌락의 정원>(그림)의 커다란 복제품을 선물로 주었다. 그때는 내게도 그런 날이 오리라고는 생각도 못 했으나, 몇 년 뒤 나는 서양미술 순례 여행을 실현했고, 프라도 미술관에서 <쾌락의 정원>을 이 눈으로 볼 수 있었다.
자세히 보니 그 그림은 바로 ‘디스토피아’를 묘사한 것이었다. 참으로 기괴한, 참으로 자유로운 그 상상력이라니! 그 ‘디스토피아’의 이미지에 나는 분명 마음이 설렜다.
현실은 때로 인간들의 상상력을 훨씬 뛰어넘는 잔혹한 맨얼굴을 보여준다. 하지만 인간들 중에 어떤 이는 그런 현실의 잔혹마저 까마득히 뚫고 나가는 상상력을 작품 세계로 전개해서 보여준다. 자신이 내던져져 있는 ‘디스토피아’를 응시하려는 그 불가사의한 힘, 즉 ‘예술의 힘’이 ‘디스토피아적 세상’을 살아가는 힘이 되기도 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