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해진 ㅣ 소설가
존더코만도스(Sonderkommandos)라는 단어가 있다. 얼핏 탄탄하고 다부진 스포츠 선수의 이름처럼 들리지만, 사실은 ‘특수부대’라는 의미의 독일어이다. 나는 이 단어를 아우슈비츠 생존 작가인 프리모 레비의 <가라앉은 자와 구조된 자>를 읽으며 알게 됐다. 아우슈비츠에서 특수부대는 유대인 포로들로 구성된 화장터 운영팀을 의미했는데, 화장터로 들어가는 동료 포로들의 옷과 신발과 가방 등을 분류하는 일, 그들이 시체로 변한 뒤엔 머리카락과 금니를 정리하는 일, 그리고 화로에서 재를 꺼내 제거하는 일을 했다. 특수부대라고 해서 생존이 담보된 건 아니었다. 나치는 특수부대의 존재를 은폐하기 위해 수시로 그 구성원을 교체했고 교체당한 구성원은 그들이 정리하고 청소한 화장터에서 재가 되었다. 그리고 그 재는 강물에서 덧없이 소멸했다.
2016년에 개봉한 라슬로 네메시 감독의 <사울의 아들>은 바로 이 존더코만도스인 사울이 주인공이다. 캄캄한 극장에서 영화를 보며 나는 두번 충격을 받았는데, 일단 자신의 죽음을 유예한 채 동료의 죽음을 청소해야 했던 존더코만도스의 잔인한 현실이 눈앞에서 충실하게 재현되어서였다. 그런데 이 재현은 주인공 사울의 시선에 국한되어 있어서, 그러니까 철저하게 사울의 1인칭 시점으로만 그려져서 화장터의 잔인한 풍경은 적나라하게 드러나지 않는다. 한마디로 감독은 그 어떤 시체도 함부로 시각화하지 않겠다는, 희생자의 훼손된 신체를 예의를 다해 존중하겠다는 태도를 기법을 통해 전한 셈이다. 이 메시지는 직접적인 말보다 강렬했고, 나는 기법으로 증명된 그의 윤리에 영화 자체보다 더 큰 충격을 받았다. 나를 돌아보게 한 충격이었다.
최근 문단―사실 개개의 작가들에게 문단은 실재하지 않는다. 그저 잘 쓰면 다음 작품을 발표하거나 출판할 기회를 또 얻을 수 있고 못(안) 쓰면 잊히는 곳, 그래서 끊임없이 쓸 수밖에 없게 하는 자장이 흐르는 곳이라고 표현한다면 아주 틀리지는 않을 것이다―에는 이 재현의 윤리를 둘러싼 논란이 있었다. 허락이나 양해 과정 없이 타인의 고민과 삶의 일부를 소설에 그대로 쓴 소설가의 잘못은 너무도 명백하지만, 해당 소설가가 상을 반납한 뒤 사과했고 그의 책을 출간한 출판사들이 책의 교환과 환불을 결정한 이 시점에서 소설가의 실명을 밝히며 사건의 개요를 길게 설명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무엇보다 논란의 여파로 상처 입은 사람들에게 또 다른 상처를 가하지 않으면서 그 과정을 설명할 재간이 내게는 없다. 다만 나는 이렇게 쓰고 싶을 뿐이다. 타인의 삶과 고통을 조심스럽게 살피고 그 재현에서 예의를 다한 작품은 결국 “우리가 아닌 사람들을 위해 슬퍼할 능력을 길러”(수전 손택, <문학은 자유다>)주며 창작물이 그 슬픔의 능력을 추구하는 한 이 세계도, 아니 일부의 사람들이라도 공감을 해줄 거라고, 몇해 전 본 <사울의 아들>이 내게 하나의 지평이 되어주었듯이….
윤리, “우리 욕망의 심연을 투철하게 응시하고자 하는 시선의 산물”(서영채, <문학의 윤리>), 소설을 쓰는 사람이 된 이후로 사실 이 단어만큼 나를 겸허하게 하면서도 두렵게 한 단어는 없었다. 욕망을 인정하되 그 욕망에 오류랄지 이중성은 없는지 끊임없이 회의하고 스스로를 의심하는 것은 영원히 녹슬지 않는 기계의 운명처럼 고단하겠지만, 또한 아름답기도 할 것이다. 이 믿음을 모든 창작자와 그들의 작품을 향유하는 사람들 모두 다시 한번 환기해주길, 사족인 줄 알면서도 덧이어 쓴다. 물론 나에게 하는 말이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