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광고

광고닫기

광고

본문

광고

오피니언 칼럼

[기고] 이 폐허를 응시하라 / 정미경

등록 2020-08-13 18:25수정 2020-08-14 02:39

정미경 ㅣ 소설가·광주광역시

그렇게 많은 물을 본 것이 언제 적인가 싶었다. 와이퍼가 잠깐씩 거센 빗방울을 거둬낸 다음 보이는 하늘에서는 그야말로 억수같이 비가 쏟아지고 있었다. 하천 위의 다리를 지나야만 집으로 가는 순환도로로 접어들 수 있었으므로, 나는 망설임 없이 다리로 막 접어든 참이었다. 그러나 곧 습관적인 선택이 얼마나 위험했는지를, 포효하는 물덩어리들을 보며 깨달았다.

죽을 수도 있겠다. 그 순간 이런 생각이 들었다. 라디오를 켜보니 멀지 않은 지역에서 사망자와 실종자가 발생했다는 뉴스가 전해졌고 나의 안위를 걱정하는 지인들의 문자메시지가 도착 알림을 띄웠다. 무서웠냐고? 물론 그랬다. 흙탕물 빛깔이 공포스러울 수 있다는 걸 처음 알았고 인간의 구조물이 내 살덩어리만큼 연약하다는 것도 알았다. 그런데 이상했다. 죽을 수도 있다는 느낌은 묘하게도 삶에의 어떤 강한 의지, 사랑하는 것들과 함께하기 위해 어떤 것도 헤쳐 나가겠다는 결의 혹은 초인적 집중력으로 이어졌다. 나는 두 손으로 핸들을 꼭 붙들고 물이 덜 차 있는 쪽이 어디인지 살핀 뒤, 외나무다리를 건너듯 운전해 나갔다. 저 앞발치에서 누군가 경광봉을 휘저으며 차들에게 좌회전 신호를 주고 있었다. 그 사람 뒤로는 이미 물에 잠겨 멈춰 버린 자동차가 서 있었다. 그가 누구인지, 믿을 만한지 전혀 식별할 수 없었지만 차들은 그의 경광봉을 따라 얌전하게 주행했다. 나도 그렇게 움직였고 움푹 팬 도로에서 몇번 더 가슴을 쓸어내렸으며 드디어 집에 도착해 사랑하는 강아지와 상봉했다.

그날 밤, 홍수의 참담한 풍경을 티브이로 지켜보면서 물과 재난과 사람들에 대해 생각했다. 나를 덮칠 듯 달려드는 물을 보며 느꼈던 건, 세상에 덩그러니 혼자 남아 기세등등한 물덩어리들과 홀로 대적해야 한다는 것, 외로움이었다. 외로움을 걷어낸 것은, 얼마 뒤면 침수될 다리 위에 있는 사람이 나뿐만이 아니라는 사실이었음도 깨달았다. 경광봉을 휘저어주었던 사람 덕분에 위험에서 벗어났다는 사실에 이르러서는, 내 자신이 속해 있지만 그다지 느껴볼 일이 없었던 공동체의 얼굴을 손으로 어루만지는 느낌이었다.

책장에서 책을 찾았다. <이 폐허를 응시하라>(2012, 펜타그램). 재난 속에서 타인을 도우며 공동체를 돌보는 선한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가 가득한 책. 몇년 전 읽었을 때 ‘재난이 천국으로 들어가는 뒷문이 될 수도 있다’는 구절에 물음표를 찍어놓았던 기억이 났다. 지진과 화재, 테러와 홍수 속에서 살아남은 사람들이 일구어내는 열정과 기쁨, 연대의 이야기들이 너무도 이상주의적이어서 불편했던 기억도 났다. 그런데 죽음의 공포와 결연함을 동시에 느꼈던 그 밤을 겪고 나니 “고통과 상실은 남들과 함께 경험할 때 다른 모습으로 바뀐다”는 구절이 꽤나 다르게 와닿았다. 폐허 속에서, 잿더미 속에서, 공동체를 더 나은 곳으로 만들고자 헌신했던 이들이 세상에 많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재난은 우리에게 약탈과 폭동, 범죄가 점철된 이미지로 각인되지만, 사실은 그보다 더 강한 도움과 연대와 돌봄이 자라는 현장이었다. 그곳에는 사소하고 작은 존재에서 공적 자아로 확장하여 스스로를 거룩하게 만들었던 이들이 있었고, 타인을 돌봄으로써 ‘시민됨’을 확인하는 조용한 희열감이 있었다. 저자 리베카 솔닛이 강조하듯, 재난 속에서 무엇을 읽어내는지는 인간이란 어떤 존재인가에 대한 믿음에 근거하고 있다. ‘재난 유토피아’라는 언뜻 모순처럼 들리는 용어를 통해 저자는 우리 모두가 타인을 돌볼 의무가 있으며, 그것은 기쁨이자 존엄한 존재가 되는 길이라 말하고 있는 것이다. 그것을 기억하며 사는 삶이란 지금과 얼마나 다를 것인가. 물이 빠진 지붕 위의 소들을 구하기 위해 안간힘을 쓰는 사람들을 보며 그런 질문을 던져본다.
항상 시민과 함께하겠습니다. 한겨레 구독신청 하기
언론 자유를 위해, 국민의 알 권리를 위해
한겨레 저널리즘을 후원해주세요

광고

광고

광고

오피니언 많이 보는 기사

이승만·박정희를 국립묘지에서 파묘하라 [왜냐면] 1.

이승만·박정희를 국립묘지에서 파묘하라 [왜냐면]

이대로 3년 더 갈 수 있다는 오만과 착각 [아침햇발] 2.

이대로 3년 더 갈 수 있다는 오만과 착각 [아침햇발]

[홍세화 칼럼] 마지막 당부: 소유에서 관계로, 성장에서 성숙으로 3.

[홍세화 칼럼] 마지막 당부: 소유에서 관계로, 성장에서 성숙으로

[사설] 인적 쇄신 한다며 불통·비선 논란만 자초한 윤 대통령 4.

[사설] 인적 쇄신 한다며 불통·비선 논란만 자초한 윤 대통령

AI시대…외국어 공부 필요 없다? [로버트 파우저, 사회의 언어] 5.

AI시대…외국어 공부 필요 없다? [로버트 파우저, 사회의 언어]

한겨레와 친구하기

1/ 2/ 3


서비스 전체보기

전체
정치
사회
전국
경제
국제
문화
스포츠
미래과학
애니멀피플
기후변화&
휴심정
오피니언
만화 | ESC | 한겨레S | 연재 | 이슈 | 함께하는교육 | HERI 이슈 | 서울&
포토
한겨레TV
뉴스서비스
매거진

맨위로
뉴스레터, 올해 가장 잘한 일 구독신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