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재봉 ㅣ 책지성팀 선임기자
소설이 말썽이다. 오토픽션(자전소설)을 표방한 어느 작가는 사적인 문자메시지를 무단으로 소설에 차용해 명예훼손으로 비난을 받고 결국 사과했다. 법무부 장관이 야당 의원의 공세에 ‘소설 쓰시네’라고 대꾸하자 한국소설가협회는 해명과 사과를 요구하는 성명을 냈고, 소설가들을 포함한 문인들 사이에서도 협회가 ‘오버한다’는 반발이 나왔다. 누리꾼들은 기발한 패러디로 협회를 조롱했다.
이즈음 소설이 사회 구성원들 사이에 회자되는 양상은 자못 참담하다. 당대의 시대정신을 담보한 문제의식으로, 아니면 장안의 지가를 들썩이게 할 상품성으로 화제에 오르면 좋으련만. 그렇기는커녕 추문과 사건, 비아냥과 비난으로나 소비되는 소설의 우울한 현주소라니. 대체 소설이 무엇이관데 이런 소동과 사건이 벌어지는 것일까. 답을 찾아보고자, 소설을 논한 글들을 다시 읽어본다.
중국의 고전 <한서> ‘예문지’는 소설을 일러 “패관(하급 관리)의 손에서 나온 가담항어 도청도설”이라고 설명한다. 가담항어와 도청도설이란 모두 길거리나 사람들 사이에 떠도는 근거 없는 소문을 뜻하는 말이니, 부질없는 이야기라는 뜻이겠다. 한국 단편소설의 완성자로 일컬어지는 상허 이태준의 산문집 <무서록>에 실린 ‘소설’이라는 글에서도 상허가 소설가임을 알게 된 친구의 부친은 대뜸 이렇게 나온다. “거, 소설은 뭘허러 짓는가? 자고로 소설이란 건 패관잡기로 돌리던 걸세. 워낙 도청도설류에 불과하거든….”
형평성 차원에서 소설에 관한 다른 견해에도 귀를 기울여보자. 소설가이자 문학이론가이기도 했던 로런스는 역시 ‘소설’이라는 제목의 글에서 소설을 일러 “위대한 발견”이자 “인간의 표현 형식 중 최고의 것”이라고 단언한다. 루카치에게는 소설이 신 없는 시대의 서사시이며, 뤼시앵 골드만에게는 타락한 세계에서 진정한 가치를 찾는 이야기 형식이다.
‘작을 소’(小) 자를 쓰는 한자 표기 때문에 소설을 좀스러운 이야기로 오해하는 경우도 있다. 김지하가 판소리 투 시집 <남>(南)을 내면서 큰 이야기를 뜻하는 ‘대설’(大說)을 표방한 것은 명백히 소설을 겨냥한 명명이었다. 그러나 소설은 결코 작은 이야기이기만 한 것은 아니다. 지극히 사소한 이야기에서부터 엄청나게 큰 이야기까지를 두루 포괄하는 장르가 곧 소설이다. 러시아의 문학이론가 미하일 바흐친에 따르면 소설은 “지금도 형성 중인” 장르이며 “유연성 그 자체”라 할 정도로 열려 있는 양식이다. 바흐친의 이런 말이 들어 있는 논문 ‘문학 장르로서의 소설’이 처음 발표된 때가 1941년이기는 하지만, 그 뒤의 80년 세월이 소설의 유연성과 가능성을 소진시켰다고 보기는 어렵다. 사진을 즐겨 활용하는 제발트의 소설들 또는 시로 된 소설 <라인>(조제프 퐁튀스)과 같은 작품은 소설의 여전한 형식적 유연성을 보여주는 사례의 일부일 뿐이다. 갈수록 세를 불려가는 전자책 형태의 소설에서는 영상과 음향을 결합하는 시도도 나오고 있다.
“말하기를 이야기는 다 거짓말이고 노래는 참말이라 하니께요.”
박경리의 대하소설 <토지> 앞부분에서 봉순네는 어린 서희에게 이렇게 말한다. 허구의 이야기인 소설의 의미를 깎아내리는 말이자, 소설에 비해 시의 우위를 확인하는 발언으로도 들린다. 그러나 같은 작품 중반부에서 월선의 백부인 공 노인은 봉순 어미의 이런 말을 정면으로 부정한다. “아니지이, 얘기책 그게 다 참말인 기라. 그러고 보니 우리가 모두 얘기책 속에서 살고 있다 안 할 수 없구먼.” 공 노인이 알지는 못했겠지만, 그는 ‘삶이 예술을 모방한다’는 오스카 와일드의 저 유명한 정의를 자기 식으로 변주한 셈이다.
공 노인의 말처럼 우리는 모두 소설의 등장인물들이다. 삶이라는 소설 또는 소설로 표현된 삶 속에서 우리는 무엇을 꿈꾸고 무슨 행동을 하는 것일까. 말을 바꾸자면, 우리는 왜 소설을 쓰고 읽는 것일까. 이 질문에 대해서는 작고한 평론가 김현의 답이 여전히 유효해 보인다. “이 세계는 과연 살 만한 세계인가, 우리는 그런 질문을 던지기 위해 소설을 읽는다.” 소설은 비록 더럽고 비참한 상황을 그리더라도 그 안에는 유토피아를 향한 소망이 오롯이 간직되어 있다. 그래야 한다. 추문과 비아냥 사이에서 길을 잃은 한국 소설에 공 노인과 김현의 말을 들려주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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