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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류허, 개혁에서 ‘반미 무역전쟁’ 사령관으로

등록 2020-08-18 15:35수정 2020-08-19 02:39

박민희의 시진핑 시대 열전 _04
2020년 1월15일 미국 워싱턴 백악관 이스턴룸에서 류허 중국 부총리(왼쪽)와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서명을 마친 1단계 무역합의문을 나란히 들고 있다. 워싱턴/AP 연합뉴스
2020년 1월15일 미국 워싱턴 백악관 이스턴룸에서 류허 중국 부총리(왼쪽)와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서명을 마친 1단계 무역합의문을 나란히 들고 있다. 워싱턴/AP 연합뉴스

중국 지도부는 국내에서는 첨단기술 자립과 국내시장에 의존해 미국의 공세를 이겨내려는 ‘지구전’을 준비하면서, 국제적으로는 미국의 포위망에 맞서 최대한 우군을 늘리려는 합종연횡을 시도하고 있다. 미국의 중국 포위 전략에 맞서 류허는 100년 전 리훙장이 겪은 치욕과는 다른 결말을 만들어낼 수 있을까.

미-중 무역전쟁의 중국 쪽 ‘사령관’인 류허(劉鶴·68) 부총리가 미국과의 무역협상을 위해 2019년 5월9일 워싱턴으로 향할 무렵, 중국 인터넷에서는 류허를 청일전쟁 패배 뒤 시모노세키 조약을 맺어야 했던 청의 북양대신 리훙장에 비유하는 글이 퍼졌다. 1895년 시모노세키 조약으로 청은 일본에 대만을 할양하고 거액의 배상금을 지급해야 했다. 이제 미국이 무역전쟁을 빌미로 중국의 주권을 침해하려 하고 있으니 류허 부총리가 절대로 굴복해선 안 된다는 여론의 ‘압박’이었다.

당시 미국은 중국 당국이 ‘중국제조 2025’ 프로젝트를 추진하면서 미래 산업을 주도하는 대형 국유기업과 첨단산업 분야에 대규모 보조금과 금융 특혜를 주고 해외 기업에 기술 이전을 강요하는 행위를 중단하라고 요구했다. 중국은 미국의 요구 대부분을 수용하는 타협안에 잠정 합의했지만, 미국은 중국의 약속을 믿을 수 없다며 중국이 합의안 이행을 국내법 개정으로 보장하겠다는 내용을 합의문에 명시해야 한다고 요구했다. 협상을 앞두고 중국 지도부가 협상안을 검토하는 자리에서 “지나친 양보를 했다”는 비난이 류허에게 쏟아졌다. 결국 시진핑 주석이 “모든 책임은 내가 진다”며 잠정 합의안 가운데 3분의 1 정도를 빼도록 지시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후 이어진 몇번의 협상 결렬과 기나긴 줄다리기 끝에 2020년 1월15일 워싱턴에서 류허 부총리는 트럼프 미국 대통령과 ‘1단계 무역합의’에 서명해 ‘불안한 휴전’을 이뤄냈다.

류허는 애초 ‘친미적 시장주의자’로 알려져 있었다. 하버드대에서 국제금융 등을 공부한 류허는 자원 배분 과정에서 정부의 개입을 줄이고 시장이 기본적인 역할을 해야 한다고 주장해온 학자 출신이다. 시진핑 주석이 취임하자마자 류허를 ‘경제 책사’로 발탁한 것은 ‘금융 분야 등에서 미국과 협력을 원한다’는 신호로 여겨졌다.

류허의 급부상에는 시진핑과의 긴밀한 신뢰가 있다. 2013년 5월 시 주석이 오바마 행정부의 백악관 국가안보보좌관이던 톰 도닐런과 만나 “이 사람이 류허입니다. 나에게 매우 중요한 사람입니다”라고 소개한 것은 유명한 일화다. 두 사람의 인연은 1960년대 류허가 베이징 101중학에, 시진핑이 81중학에 다니던 시절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 간부 자제들이 다니던 두 명문 학교는 교류가 많았고 시진핑은 똑똑한 학생으로 유명했던 한살 위 류허를 알게 됐다. 문화대혁명 시기에 류허는 지린성의 농촌으로 보내져 농사를 짓고 이후 군에 입대했으며 1973년부터는 6년 동안 베이징 라디오 공장에서 일했다. 1979년 인민대학에 입학한 류허는 공업경제학을 전공했고, 이후 국무원 발전연구중심과 국가발전개혁위원회에서 근무했다. 그는 1990년대에 하버드대 케네디스쿨에서 국제금융과 무역으로 석사학위를 받은 뒤, 2003년 중앙재경영도소조 판공실 부주임으로서 중국 경제를 연구했다.

시진핑은 2012년 당 총서기가 되자마자 류허를 중앙재경영도소조 주임으로 발탁했다. 시 주석에게 직접 보고하며 경제정책을 수립하는 역할이다. 류허가 맡은 첫 과제는 중국의 경제구조를 대수술하는 작업이었다. 후진타오-원자바오 체제의 방만한 경제운영, 특히 2008년 금융위기 이후 경기부양을 위해 국가재정을 과도하게 투자한 결과 부채가 급증하고, 공급 과잉, 규제받지 않는 그림자금융의 문제가 심각했다. 류허는 과잉생산을 해소할 ‘공급측 개혁’, 첨단산업과 내수를 중심으로 성장모델 전환, 국유기업의 방만한 운영 개선, 부채 축소 등의 개혁 과제를 강하게 추진하고자 했다.

하지만 2015년 여름 중국 증시가 급락하고 경제성장률도 예상보다 빠르게 하락하기 시작하자, 류허의 개혁은 경제 전반에 대한 당의 통제를 강화하는 쪽으로 초점이 바뀌기 시작했다. 2018년 3월 시진핑 2기 지도부에서 류허가 경제부총리로 승진한 직후 훨씬 심각한 도전이 밀려왔다.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중국에 대한 무역전쟁의 포문을 열었다. 애초 중국 지도부는 ‘장사꾼’ 트럼프를 만만하게 여겼다. 실제로 2018년 5월과 7월 류허 부총리가 이끄는 중국 대표단은 미국 제품을 대규모로 구입해 무역분쟁을 해결하기로 미국 대표단과 원칙적 합의를 했다. 그러나 트럼프 대통령이 두 차례 모두 거부해 타협은 무산됐다. 중국은 그제야 미국의 핵심 표적은 무역적자 축소가 아닌, 중국의 첨단산업 전략 무력화와 ‘국가 자본주의’ 모델 자체를 바꾸라는 요구임을 깨달았다.

미국의 전방위 공세 앞에서 류허가 추진하던 개혁은 더이상 진행될 수 없었다. 미국과의 전면적인 경제·기술 패권 전쟁에 대비하는 일종의 ‘전시 경제’ 지휘관으로 류허의 역할도 수정됐다.

2019년 초 류허 부총리의 미-중 무역협상을 청일전쟁 패배 뒤 리훙장의 시모노세키조약 체결에 비유한 사진. 중국 인터넷 갈무리
2019년 초 류허 부총리의 미-중 무역협상을 청일전쟁 패배 뒤 리훙장의 시모노세키조약 체결에 비유한 사진. 중국 인터넷 갈무리

미-중 ‘무역전쟁’은 중국 개혁개방 이후 40년에 걸쳐 형성된 두 나라 경제의 윈윈 구조에 지각변동이 일어난 결과다. 호풍 훙 존스홉킨스대 교수의 분석에 따르면, 1990년대 중국 정부가 국유기업 민영화를 추진하는 과정에서 미국 월가의 금융기업과 대자본가들이 큰 이익을 얻었고, 중국 공산당과 월가 사이에 공생 관계가 형성됐다. 중국은 미국 주요 기업들에게 중국 시장을 열어주고 생산기지 건설에 특혜를 주면서, 이들을 미국 내에서 중국의 이익을 대변해줄 우군으로 만들었다. 이는 2001년 중국의 세계무역기구(WTO) 가입으로 이어졌고, 중국은 ‘세계의 공장’으로 변신해 초고속 성장을 이어갔다.

하지만 중국 국유기업들이 정부의 지원을 받아 급성장하자, 미국 기업들은 경쟁력을 잃고 중국 시장에서 밀려나기 시작했고, 공생 관계에는 균열이 생겼다. 특히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 중국 정부가 실시한 초대형 부양정책의 혜택이 국유기업에 집중되자 미국 기업들의 위기감은 더욱 고조됐다. 2012년 부양정책이 끝난 뒤 시진핑 정부가 일대일로(육·해상 신실크로드) 정책을 추진해 중국 기업들이 해외시장을 확대하도록 지원하자, 미국 기업들은 개발도상국 시장에서까지 중국 기업들에 밀리게 됐다. 이와 함께 중국이 막강한 외환보유고를 활용해 일대일로 참여 국가들에 대한 투자를 늘리면서 미국 금융회사들은 중국 국유은행들과의 경쟁에도 직면했다. 미국은 중국을 제압할 전면적 공세에 나섰다. 2020년 코로나19가 전세계를 강타한 뒤에는 신냉전을 막는 최후의 안전판으로 여겨졌던 미-중의 글로벌 분업 체제마저 해체 조짐을 보이고 있다. 트럼프 행정부는 미국과 가치와 기준을 공유하는 국가들끼리 경제번영네트워크(EPN)를 구성해 중국을 전세계 생산 네트워크에서 축출하려 한다.

대외환경이 계속 악화하는 가운데 류허 부총리가 지난 6월18일 상하이에서 열린 ‘루자쭈이 포럼’에서 “국내 순환을 위주로 하고 국제·국내가 상호 촉진하는 쌍순환의 새로운 발전 국면이 형성되고 있다”고 한 발언이 세계의 주목을 받았다. ‘국내 순환을 위주로 한 경제’(내순환 경제)는 중국이 폐쇄적 자력갱생 경제로 돌아가려는 신호라는 논란이 일었다.

7월21일 시진핑 주석이 ‘진화’에 나섰다. 시 주석은 류허 부총리 등과 함께 국내외 기업 경영진을 초청해 토론회를 열어 “보호주의가 고조되는 환경에서 우리는 초대형 국내시장의 이점을 충분히 발휘해 국내 대순환으로 경제발전의 동력을 증가시킴으로써 세계 경제의 회복도 일으킬 것”이라고 강조했다. 미국이 공세를 강화하더라도 중국은 ‘초대규모 국내시장’에 의지해 버틸 수 있다고 강조하면서, 동시에 세계 경제와의 교류도 계속될 것이라는 메시지를 발신한 것이다. 하지만 ‘내순환 경제’의 깃발 뒤에는 중국 경제를 둘러싼 외부 환경 악화에 대한 불안감이 짙게 깔려 있다.

미국과의 대결에서 중국이 가장 우려하는 것은 ‘금융전쟁’이다. 전세계 무역 결제의 42%, 외환보유고의 61%가 달러로 운용되고 중국 위안화의 비중은 2% 정도에 불과해, 달러 금융시스템에서 배제된다면 무역 거래나 국제 투자가 사실상 불가능해진다. 미국이 홍콩 국가보안법, 신장위구르 강제수용소와 관련해 중국을 제재할 법을 마련하자, 중국 내에서는 금융제재에 대한 경고가 줄지어 나오고 있다.

저우리 중국 공산당 대외연락부 전 부부장은 6월22일 <사회과학보>에 실은 글에서 “미국이 세계적인 달러의 독점적 지위를 이용해 중국의 발전에 점점 더 심각한 위협을 가할 것”이라고 경고했다. 팡싱하이 중국 증권관리감독위원회 부위원장도 6월 말 연설에서 “중국은 미국 달러결제 시스템에서 분리되는 상황에 대비한 긴급한 준비를 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중국 지도부는 국내에서는 첨단기술 자립과 국내시장에 의존해 미국의 공세를 이겨내려는 ‘지구전’을 준비하면서, 국제적으로는 미국의 포위망에 맞서 최대한 우군을 늘리려는 합종연횡을 시도하고 있다. 트럼프의 갑질에 지친 유럽 국가들, 이란을 비롯한 반미 국가들, 일대일로 참가국들을 결집해 미국을 역포위할 반격의 전략을 구상한다. 7월28일 유럽연합(EU) 대표들과의 화상회의에서 류허 부총리는 중국과 유럽연합의 상호투자협약을 올해 안에 체결하길 원한다고 강조했다. 중국이 ‘위안화-유로화’ 연합을 구상하고 있다는 분석도 있다. 미국의 중국 포위 전략에 맞서 류허는 100년 전 리훙장이 겪은 치욕과는 다른 결말을 만들어낼 수 있을까.

박민희 ㅣ 논설위원. 대학과 대학원에서 중국과 중앙아시아 역사를 공부했다. 중국 인민대학에서 국제관계를 공부한 뒤, 2009년부터 2013년까지 <한겨레> 베이징 특파원으로 중국 곳곳을 다니며 취재했다. <중국을 인터뷰하다>(공저)를 썼고, <중국과 이란> 등의 책을 번역했다. ‘혐중’에 반대한다. 중국과 중국인에 대한 공정한 이해와 동행을 희망한다. minggu@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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