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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백기철 칼럼] “다수는 중도에서 좌측으로 위치한다”

등록 2020-08-26 18:46수정 2020-08-27 02:42

민주당이 지금 브란트가 말한, ‘중간에서 좌측을 향하는 수많은 시민’에게 다가서고 있다고 할 수 있나. 잇단 정책 실패와 성마른 발언들로 오히려 이들과 멀어져가고 있는 건 아닌가. 미래통합당은 어느덧 ‘개혁 보수’ ‘중도 보수’의 외양을 띠어가는데 민주당은 예전의 ‘싸가지 진보’로 회귀하고 있는 건 아닌가.
김종인 미래통합당 비상대책위원장이 지난 19일 광주 5·18 민주묘지에서 무릎을 꿇고 참배하고 있다. 연합뉴스
김종인 미래통합당 비상대책위원장이 지난 19일 광주 5·18 민주묘지에서 무릎을 꿇고 참배하고 있다. 연합뉴스

얼마 전 김종인 미래통합당 비상대책위원장이 광주 5·18 민주묘지에서 ‘무릎 사과’ 한 것을 보고 ‘이 양반이 아직도 대권에 미련이 있나’ 하는 생각을 했다. 김 위원장은 비록 일주일 만에 접었지만 2017년 대선 출마를 선언한 적이 있다. 팔십 노구를 이끌고 저렇게까지 하는 건 다른 생각이 있는 거 아니냐는 추측이었던 셈이다.

사실 이 무릎 사과는 그리 짜임새 있는 이벤트는 아니었다. 빌리 브란트 독일 총리가 1970년 12월 폴란드 바르샤바의 유대인 희생자 추모비 앞에서 무릎 꿇은 걸 따라 한 것인데, 여러 면에서 모자란 ‘짝퉁’이었다.

브란트의 무릎 사과는 미리 계획된 게 아니었다. 그는 나중에 “머리 숙이는 것만으로는 충분치 않다는 느낌이 들었다”고 말했다. 무릎 꿇는 건 순간적 직관이었지만 역사적 화해는 오래 준비했다. 2년9개월 전인 1968년 3월 브란트는 2차 세계대전 패전으로 그어진 폴란드 쪽 오데르-나이세 국경선을 인정하겠다고 처음으로 밝힘으로써 폴란드에 화해의 손짓을 보냈다. 1년 전에는 바르샤바에 보낼 제안을 담은 편지까지 미리 작성해놓았다. 브란트의 무릎 사과는 화해의 시작이 아니라 결말이었던 셈이다.

김 위원장의 무릎 사과는 행사 전 당직자들과 상의해서 준비한 일종의 ‘연출’이었다. 당 차원에서 제대로 준비한 흔적도 많지 않다. 김 위원장은 4년 전 민주당 비대위원장 때도 5·18 묘지를 찾아 사과했으니 사과만 남발한다는 말을 들을 법도 하다. 더욱이 전두환 군부의 통치기구였던 국보위에 참여한 전력까지 있으니 사과 자격도 미달이다. 오히려 개인적 면탈을 위한 것 아니냐는 눈총도 받음직하다.

하지만 이 무릎 사과는 ‘극우 보수’ ‘꼴통 보수’의 화석처럼 돼 있던 미래통합당이 서서히 가운데로, 왼쪽으로 움직이기 시작했다는 걸 보여준다. 새 정강정책에 ‘5·18 정신 계승’을 넣는 것 역시 같은 맥락이다. 아직 5·18에 대한 당 차원의 진정성을 입증해 보이기에는 역부족이지만 어쨌든 출발점에 섰다.

최근 미래통합당의 좌클릭, 중도 행보는 눈여겨볼 만하다. 기본소득을 정강정책 1호로 채택했고, 선거연령을 만 18살 이하로 낮추기로 했다. 종전 황교안 체제에선 생각하기 어려운 변화다. 4차 추경, 2차 재난지원금 선별 지급 등 정책 이슈도 선점하고 있다. 코로나 와중에 전광훈류의 ‘아스팔트 보수’에 발목이 잡혔지만 오히려 이번 일을 이들 ‘자해성 보수’들과 결별하는 계기로 삼을 만도 하다.

브란트는 생전에 “다수는 중도에서 좌측 방향으로 위치한다”는 유명한 말을 남겼다. 게르하르트 슈뢰더 독일 총리는 자서전에서 이 말을 소개하면서 “정치적 추세를 읽어내는 브란트의 미세한 촉에 매료됐다”고 썼다. 브란트의 말은 일단 ‘좌측 방향’에 강조점이 있어 보이지만 그가 그린 ‘정치의 모습’이 잘 담겨 있기도 하다. 다수의 시민이 양극단이 아니라 중도적 위치에 서 있으면서도 눈은 더 낮은 곳, 가난하고 고통받는 이들을 향하는 모습이 연상된다.

브란트 말은 구체적인 이념이나 정책보다 상황을 바라보는 정치적 태도로서 의미가 있다. 통합당의 변신 노력은 이런 ‘정치적 태도’와 외견상 맥락이 닿아 있다. 그런 의미에서 김종인·주호영 팀은 황교안 체제와는 비교되지 않을 정도의 ‘강팀’이다. 또 당내에서 시대 흐름을 제대로 읽고서 치고 나오는 인물이 없다면 김종인 위원장이 대세를 장악할 가능성을 아주 배제할 수도 없다.

통합당의 변신과 극적으로 대비되는 건 최근 더불어민주당 모습이다. 지도부 선출을 위한 전당대회 흥행이 실패한 탓도 있겠지만 요즘 민주당은 왠지 ‘그들만의 리그’ 같다. 지난해 조국 사태에 이어 최근 부동산 문제로 가뜩이나 어려운 상황에서 힘을 모으고 흩어진 지지자들을 규합하려는 모습을 찾기 어렵다. 당 주변의 열성 지지자를 향한 강성 발언들만이 돌출된다.

민주당이 지금 브란트가 말한, ‘중간에서 좌측을 향하는 수많은 시민’에게 다가서고 있다고 할 수 있을까. 잇단 정책 실패와 성마른 발언들로 오히려 이들로부터 멀어져가고 있는 건 아닌가. 통합당은 어느덧 개혁 보수, 중도 보수의 외양을 띠어가는데 민주당은 곳곳의 내전과 거친 말들이 쌓여 예전의 ‘싸가지 진보’로 회귀하고 있는 건 아닌가.

이번 주말 민주당 전당대회에서 새 지도부가 들어선다. 이낙연, 김부겸, 박주민 후보 중 한명이 180석 집권 여당을 이끌게 된다. 어쩌면 민주당에는 이번이 최근의 난맥상을 만회할 절체절명의 기회일지 모른다. 싸가지 진보가 아니라 ‘일하는 진보’ ‘합리적 진보’ ‘겸손한 진보’로 거듭나야 한다.

백기철ㅣ편집인 kcbaek@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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