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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전치형, 과학의 언저리] 광화문광장의 공기

등록 2020-08-27 16:45수정 2020-08-28 02:39

우리는 광장의 공기를 멀리하는 동시에 그것을 따라다니며 연구해야 하고, 내가 숨 쉴 공기를 요구하는 동시에 공동체의 공기를 위해 내 몫의 짐을 져야 한다. 한동안 광장은 함께 숨쉬기 두려운 공간으로 남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다시 함께 숨쉬기 위한 노력도 광장에서 시작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전치형 ㅣ 카이스트 과학기술정책대학원 교수·과학잡지 <에피> 편집위원

2016년 광화문 촛불집회에 참석한 수십만 명은 벅찬 가슴으로 광장의 공기를 나눠 마셨다. 그것은 마치 대한민국이라는 정치 공동체를 지탱해 주는 ‘민주주의의 공기’ 같은 것이었다. 광화문광장은 무엇보다 시민들이 함께 숨 쉬는 곳이었다. 온라인으로 의견을 표출하는 그 어떤 스마트폰 앱도 ‘같이 숨쉬기’에 필적하는 정치적 힘을 낼 수 없었다. 지금은 우리가 비말이라고 이르는 것이 오가는 공기 속에서 당시 사람들은 새로운 정치를, 국가와 시민의 새로운 관계를 설계했다.

2020년 광장의 공기는, 광장에서 같이 숨을 쉬는 것은, 공동체의 안녕에 심각한 위협이 되었다. 지난 광복절에 열린 집회에 참석해서 광화문의 공기를 같이 마시고 흩어진 사람들은 그 의도가 무엇이었든 동료 시민의 건강을 해치는 존재로 여겨진다. 집회 참가자들이 코로나19 검진을 받으라는 당국의 연락을 피해 다니는 장면은 국가와 시민사회와 종교의 관계를 새로 설정해야 할 필요를 부각하기도 했다. 2016년과 2020년, 광화문이라는 같은 장소를 채운 상이한 공기는 우리를 전혀 다른 관계들로 이끈다.

광장의 공기는 회복될 수 있을까. 광장은 다시 같이 숨 쉬는 공간으로 돌아올 수 있을까. 2020년 광장의 공기는 일시적이고 예외적인 상태일 뿐이며 우리는 곧 2016년의 공기라는 정상 상태로 돌아갈 수 있으리라는 낙관은 쉽지 않다. 코로나19가 종식되기만 하면 우리는 다시 광장에서 공기를 같이 호흡함으로써 공동체를 재구성할 수 있으리라는 기대도 아직 이르다. 지금의 텅 빈 광장이 ‘뉴노멀’이라면, 광장의 공기는 이제 자유가 아니라 감염 위험을 뜻한다면, 우리가 맺고 있는 모든 사회적·정치적 관계는 어떻게 달라질 것인가.

지금은 바이러스를 옮기는 위험한 공기가 광장을 지배하고 있지만, 지난 몇 년 동안 광화문은 다른 공기 재난의 현장이기도 했다. 2018년 미세먼지를 품은 공기가 광장을 채울 때는 ‘미대촉’(미세먼지 대책을 촉구합니다) 회원들이 모여 정부가 공기 관리에 더 적극적으로 나서라고 요구했다. “정부는 초미세먼지 걱정 없는 숨 쉴 권리 보장하라!”, “공기 잃은 나라엔 미래가 없다!” 같은 구호가 광화문광장에 울렸다. 미세먼지를 통해 광화문의 공기는 정치의 대상이자 결과가 되었다.

광화문의 공기는 또 과학의 대상이기도 하다. 지난 8월7일, 그러니까 광복절 집회 일주일 전쯤, 광화문광장에서는 박문수 한국외국어대 대기환경연구센터장이 이끄는 연구진이 마스크를 쓴 채 카트 하나를 밀고 다녔다. 도시의 폭염과 열섬 현상을 연구하는 과학자들이 1년에 한 번씩 광화문에 나와 광장의 뜨거운 공기를 측정하는 날이었다. 카트에는 사람 키 높이 언저리에서 광장의 공기 상태를 측정하기 위한 장치들이 실려 있었다. 이날 폭염 연구 현장을 취재하고 온 카이스트 학생들에 따르면, “온도, 풍속, 습도 센서가 곳곳에 심어진 광화문광장은 뜨거운 공기 속에서 과연 개인과 공동체가 살아남을 수 있을지 가늠해 보는 야외 실험실이 되었다.”

광화문의 다양한 공기 풍경이 시사하는 것은 새로운 ‘공기 관계’, 즉 공동체의 구성원들이 공기를 호흡하고, 배치하고, 관리하는 데에 필요한 지식, 기술, 제도, 규범의 재설정이다. 누가 어떤 공기를 누구와 함께 마실 수 있는지를 전면적으로 재고하는 것이다. 이것은 단지 코로나19만이 아니라 미세먼지와 폭염 등 인간이 지구와 맺어 온 관계가 낳은 중층적 공기 위기에 대응하는 일이다. ‘공기 관계’는 과학과 의학의 문제일 뿐만 아니라 교육, 노동, 젠더, 인종, 종교의 문제를 내포한다. 거리두기를 실천하고 당분간 광장을 비워두는 것을 넘어, 광화문광장을 다시 함께 숨 쉴 만한 곳으로 만드는 데에는 정치 공동체, 과학 공동체, 그리고 무엇보다 호흡 공동체의 온 역량이 필요하다.

정치, 과학, 종교가 뒤얽힌 광화문광장의 공기는 이 위기의 다중성을 압축적으로 드러내는 한편 우리가 새로운 지식과 규범을 통해 구성할 ‘공기 관계’의 실마리를 준다. 우리는 광장의 공기를 멀리하는 동시에 그것을 따라다니며 연구해야 하고, 내가 숨 쉴 공기를 요구하는 동시에 공동체의 공기를 위해 내 몫의 짐을 져야 한다. 한동안 광장은 함께 숨쉬기 두려운 공간으로 남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다시 함께 숨쉬기 위한 노력도 광장에서 시작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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