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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김한민의 탈인간] 미개를 향한 의지

등록 2020-08-30 18:28수정 2020-08-31 12:54

김한민ㅣ 작가·시셰퍼드 활동가

미개(未開)는 아직 열리지 않음이다. 무엇의 열림인가? 생각의 눈이다. 우리는 ‘계기의 버스’들을 타고 내리는 존재들이다. 내 세계에 갇혀 살다가 어떤 버스를 타고 여정을 겪으면, 승차할 때보다 조금은 열린 내가 되어 하차한다. 과거의 인류가 ‘종교·과학·이데올로기 버스’를 거쳤다면, 21세기 들어 웬만한 노선은 ‘자본주의 버스’ 일색이 되었다. 모두가 이 버스만 줄곧 타고 내리면서 어느덧 필수 코스로 정착했다. 이 버스에서 익히는 논리, 즉 ‘자본-테크’의 매력은 하나만 연마하면 나머지는 딸려오는 ‘올-인-원’ 패키지라는 점. 자본-테크에만 눈뜨면 나머지는 미개해도 괜찮다. 가령 ‘기후 버스’처럼 배차 간격이 긴 버스는 몰라도 그만이다. 최근 ‘양성평등 버스’가 부상하긴 했지만, 아직 갈 길이 멀다는 징후들이 곳곳에서 나타난다.

한때 미개의 반대말은 계몽이었다. 계몽된 문명인은 과학 발달의 혜택을 누리며 사회·문화·윤리적 진보에 두루 밝은 인간을 지칭했다. (경제관념은 여러 ‘교양’ 중 하나였다.) 문명인은 야생에 사는 원주민을 미개인 취급했다. 그런데 가만 보니 미개한 건 우리 현대인 같다. 무분별한 개발로 자연을 착취하다가 인수공통감염병을 ‘배양’하다시피 했고, 국지적 감염으로 끝나야 할 역병을 팬데믹급으로 키워놨다. 그래놓고는 근본 원인에 대한 아무 조치 없이, 마스크·배달서비스·일회용품·살처분으로 대충 넘어갈 수 있다고 생각한다. 최근 국내외 사건들을 접하면 인종차별이나 성차별 문제는 되레 퇴보하는 것만 같다. 인류의 지능이 딱 여기까지인가? 피부색과 성으로 차별하지 않는 일이 그렇게까지 어려운 일일까? 스마트폰을 자유자재로 사용해 내비게이션 앱과 공인인증서를 멀티로 다루며, 복잡한 주식시장과 회계 용어를 섭렵한 머리와 노력의 1%만 써도 이 세계가 여전히 이 상태일까?

누군가는 이렇게 답하리라. “문제는 경제야, 멍청아!” 그들에게 경제 이외의 이슈는 더 먹고살 만해지면 알아서 해결되는 지엽적인 문제다. 경제성장을 1순위로 두지 않는, 돈의 흐름과 테크놀로지 적응에 느린, 기후·환경·동물권·성소수자·난민·장애인 이슈가 지금 당장, 동시에 해결해야 할 이슈라고 보는 나 같은 사람이야말로 세상 물정에 어두운, 계몽이 필요한 미개인이다.

여기서 동시대 미개의 특징이 나타난다. 과거의 미개는 불가피하고 안타까운 측면이 있었다. 기회가 없거나 교육을 못 받아서 생각이 닫혀버린, 무고한 미개랄까. 그러니 어쩌다 운이 좋아 미개를 벗어났다고 자랑할 일도 아니었다. 그러나 지금의 미개는 선택적이고 계산된 미개이다. 기회가 부족해 처하게 된 의식 상태가 아니라, 미개 상태가 주는 편의를 적극 유지·연장하려는 의지로 충천한, 당당하다 못해 뻔뻔한 미개이다. 그리하여 돈만 있으면 다른 부문엔 ‘젬병’이라도 흉이 안 되는 세상을 간파한 ‘자본 계몽인-나머지는 미개인’들이 창궐했다. 가짜뉴스 생산에 능한 그들은 ‘미개교’를 포교하느라 분주해 방역 수칙 따윈 안중에도 없다. 과학을 부인하는 족속이니 기록적 장마, 즉 명백한 기후변화를 겪어도 기후변화와 연결하긴커녕 기상청 탓만 한다.

변두리 이슈의 권리를 찾으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권력을 향한 의지’를 설파한 니체에 따르면, “타인의 권리란 우리의 힘이 타인의 힘에 양보하는 것”이니, 힘을 키우는 방법뿐이다. “문제는 기후라고, 미개인들아!”라고 거꾸로 호통칠 수 있는 세상이 되도록 말이다. 아직 미약한 우리의 유일한 힘은, 미래가 우리 편이라는 확신이다. 다소 늦더라도 인종, 성, 성적지향, 종에 의한 차별이 해소되는 방향으로 역사가 전개될 거라는 믿음이다. 제발 현실이 되지 않기를 바라지만 가시화되는 미래도 있다. 이를테면 우리가 겪은 가장 긴 장마가 향후 가장 짧았던 장마로 기록될, 우리가 겪은 최악의 폭염이 향후 가장 시원했던 여름으로 기록될, 그런 미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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