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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전치형, 과학의 언저리] 코로나19 재난 보고서를 쓴다면

등록 2020-09-24 17:53수정 2020-09-25 14:36

전치형 ㅣ 카이스트 과학기술정책대학원 교수·과학잡지 <에피> 편집위원

코로나19 극복 성공 스토리 대신에 코로나19 재난 보고서를 쓰자는 것은 예전부터 있다가 2020년에 폭발해버린 재난적 삶의 조건에 더 주목하자는 제안이다. 확진자 수만이 아니라 바이러스가 파고든 사회의 갈라진 틈을 중요한 지표로 삼아야 한다.

미국 잡지 <애틀랜틱>에 과학 기사를 쓰는 에드 용은 이번 9월호에 ‘팬데믹은 어떻게 미국을 무너뜨렸는가’라는 제목의 긴 글을 실었다. 기사에는 바이러스, 백신, 마스크, 호흡 장치에 대한 내용도 있었지만, 더 중요하게 등장한 것은 인종주의와 건강불평등,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의 무능과 거짓, 각종 매체를 통한 가짜 뉴스의 전파 등이었다. 과학과 의학 전문가가 여럿 등장하는 과학 기사였지만, 또한 정치 기사이고 사회 기사였다. 용은 바이러스가 신체만이 아니라 사회의 모든 갈라진 틈으로 들어가 그 근간을 흔들어놓는다는 점을 강조했다. 코로나19 시대에 바이러스와 감염병에 대한 과학 기사는 일종의 재난 보고서가 되었다.

코로나19 사태에서 미국의 처참한 실패를 설명하려는 노력이 재난 연구의 관점에서 시작되는 것은 당연하다. 2001년의 9·11 테러 사건을 연구했던 글렌 코벳과 스콧 놀스는 지난 8월에 발표한 글에서 코로나19의 문제를 총체적으로 밝혀낼 재난 조사 기구를 만들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특히 이 재난에 대한 조사는 단지 진단검사 키트와 호흡 장치 공급 문제만을 따지는 것이 아니라 감염병의 불평등한 진행을 초래한 인종주의의 문제까지 다루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들이 주장한 조사 기구가 생겨서 보고서를 낸다면, 미국의 코로나19 재난은 2019년이나 2020년이 아니라 적어도 수십년 전에 시작된 사건으로 기록될 것이다.

한국에서 코로나19 보고서를 쓴다면 무엇이 담겨야 할까? 미국이 코로나19에 무너진 것과 달리 한국은 바이러스를 성공적으로 무찔렀음을 자랑하는 보고서를 써야 할까? 한국의 코로나19 보고서는 정부에서 희망하는 것처럼 ‘승리’를 기념하고 ‘영웅’을 칭송하는 것으로 마무리해도 괜찮을까?

코로나19 팬데믹, 즉 모든 곳의 모든 사람을 위협하는 감염병 재난 앞에서 이제 영웅적인 승리와 성공의 서사는 효과적으로 작동할 수 없다. 앞으로 반복되거나 지속될 지구적 재난들 앞에서 우리의 처지는 성공과 실패로 구분되지 않고, 빛과 그림자로 적당히 나누어지지 않는다. 미국은 실패했지만 한국은 성공했다고 자랑하기 어려운 것은 바이러스 앞에 드러나버린 미국 사회의 고질적 문제가 한국에도 다른 모양으로 존재하기 때문이다.

한국은 코로나19 확진자와 접촉자를 빠르게 찾아내는 나라이면서 약 20년 동안 가습기 살균제 때문에 사망한 사람이 몇명인지 다 파악하지 못하고 있는 나라다. 2015년 메르스 사태의 교훈을 코로나19 대응에 활용할 줄 아는 나라이지만, 2018년 태안 화력발전소에서 김용균씨가 기계에 끼여 사망한 일을 두고 특별조사위를 만들어 ‘진상규명’과 ‘재발방지’를 다짐했음에도 올 9월 같은 곳에서 또 사람이 죽게 만드는 나라다. 납득하기 어려운 이유로 사람들이 죽어나가는 것은 여전한데, 우리는 가끔씩만 현명하게 대응하고 대개는 실패를 반복한다. ‘케이(K) 방역’의 성공 뒤에서 더 많은 ‘케이 재난’이 이어지고 있다.

코로나19 극복 성공 스토리 대신에 코로나19 재난 보고서를 쓰자는 것은 예전부터 있다가 2020년에 폭발해버린 재난적 삶의 조건에 더 주목하자는 제안이다. 확진자 수만이 아니라 바이러스가 파고든 사회의 갈라진 틈을 중요한 지표로 삼아야 한다. 코로나19 재난 보고서에서는 콜센터, 물류센터, 요양병원, 정신병동에서 발생한 감염과 죽음이 바이러스를 물리친 큰 전쟁에서 불가피했던 부수적 희생이 아니라 사회적 재난의 핵심 피해 사례가 된다. 보고서의 권고 사항에는 바이러스 및 백신 연구 지원만이 아니라 밀집, 밀폐, 밀접 공간에서 일하고 사는 것을 멈출 수 없는 사람들의 보호가 포함되어야 한다. 더 적은 사람에게 더 적은 비용으로 일을 떠맡기는 시스템의 문제를 지적하고, 꼭 필요한 곳에 충분한 수의 사람을 배치해서 신체적, 심리적, 사회적 고통을 줄일 수 있는 제도를 권고해야 한다.

재난 보고서의 기본 덕목은 성찰과 겸허다. 성공 스토리가 아닌 재난 보고서로 코로나19를 기록하는 것은 이 사태가 오래도록 종결되지 않을 것임을 인정하는 일이다. 어쩌다 종식된 것처럼 보여도 곧 비슷한 다음 재난이 닥칠 것을 예상하면서 쓰는 보고서다. 다만 다음번에는 조금 더 오래 버티기를, 조금 덜 고통스럽기를 바라면서 현재 사태의 원인과 결과를 성찰하며 겸허히 적어나가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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