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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조해진의 세계+] 환대의 공간, 독립서점들

등록 2020-10-04 16:24수정 2020-10-05 02:40

조해진 ㅣ 소설가

소설을 읽는 즐거움 중 하나는 (불)가능한 삶의 형태를 꿈꿀 수 있다는 것 아닐까. 이주란의 단편소설 <한 사람을 위한 마음>은 지방의 작은 서점에서 일하는 ‘조지영씨’가 주인공인데, 나는 이 소설을 읽으며 책에 둘러싸여 일하는 또 한 명의 ‘조지영’이 되는 상상을 하며 즐거워한 적이 있다. 물론 현실은 꿈과 다르다는 것을 잘 안다. 상가 임대료는 만만치 않고 사지도 않을 책을 훼손하는 식의 민폐형 손님은 어느 서점에나 방문할 수 있으며, 무엇보다 책은 대개 팔리지 않는다. 요즘에는 전국의 모든 독립서점 운영자들에게 근심이 하나 더 생겼다. 바로 문화체육관광부가 추진하는 ‘도서정가제 개정안’에서 비롯된 근심이다. 문체부의 개정안에는 도서정가제의 예외 범위를 확대하고 전자출판물의 할인율을 높이는 등의 내용이 담겨 있는데, 이러한 정책은 독립서점들의 입지 조건을 더 열악하게 하는 결과를 낳을 것이 분명하다.

나는 문장을 기우며 생활을 운영하는 사람이지만, 사실 하루 중 쓰는 시간보다 읽는 시간이 더 길다. 특히나 내 눈으로 직접 본 뒤 정가로 구매한 책은 더 애틋하게 읽게 된다. 언제부터인가 여행이나 북토크 같은 행사로 다른 도시에 가게 되면 꼭 그 도시의 서점 한 군데에 들러 책 한두 권을 구매한다. 그렇게 구매한 책은 식당과 커피숍, 그리고 기차 안에서 조금씩 읽힌다. 내가 잠시 들렀던 그 도시는 그렇게 책과 함께 기억된다. 어쩌면 삶의 방정식은 단순한지도 모른다. 어떤 공간에서 향유한 시간이 풍요롭다면 기억들의 총합 역시 두터워지는 식의 단순한 산출….

2014년 도서정가제 도입으로 독립서점은 어렵게나마 자생적으로 생태계를 일구게 되었고, 덕분에 독자와 작가 모두에게 뜻깊은 작은 행사들이 이전보다 훨씬 더 늘게 되었다. 감사하게도 나 역시 여러 서점에서 환대를 받은 기억을 갖고 있는데, ‘타자에게 자리를 주는 행위, 혹은 사회 안에 있는 그의 자리를 인정하는 행위’(김현경, <사람, 장소, 환대>)로서의 그 환대의 기억은 언제나 내게 위로가 되었고 다시 쓸 수 있는 힘을 주기도 했다. 소설 쓰는 사람으로서 초대를 받았을 때뿐 아니라 손님으로 잠시 들른 독립서점에서도 늘 그랬다. 저마다 경영의 어려움이 있을 텐데도, 적어도 내가 가본 모든 독립서점들은 찾아오는 손님에게 환대의 자리를 마련해주려 애썼고 독서토론, 글쓰기 워크숍, 전시 등 여러 프로그램을 기획하여 지역 사회 안에서 근사한 기억의 공동체를 이루려고 분투하고 있었다. 단순히 책을 파는 상점을 넘어서 보이지 않는 추억과 위로가 축적되고 교환되는 장소….

가끔은 내게 울림을 준 어떤 책을 다른 누군가도 읽었다고 생각하면 이유 없이 마음이 든든해지곤 한다. 존 버거의 표현을 빌리자면, ‘그 이야기의 후예 혹은 후계자가 된’(<벤투의 스케치북>) 사람이 나만은 아닐 테니 말이다. 가령 카프카를 읽은 사람들은 ‘카프카의 후예’라는 하나의 종족을 이룬 것이나 다름없지 않을까. 독립서점에서는 그런 공통된 기억이 발아될 수 있고, 실제로 발아되고 있다. 사람과 그 사람이 안고 있는 문장을 환대해주는 독립서점들을 지켜주면 좋겠다. 지난 6년 동안 독립서점들이 어렵게 일군 생태계를 파괴하지 말고 부디 독려해주기를. 소비자 후생은 책값 할인이 아니라 책을 진정 향유할 수 있는 공간을 마련해주는 데서 더 오래, 그리고 더 의미 있게 실현된다는 것을 헤아리는 시선이 이번 도서정가제 개정안 쟁점에는 절실해 보인다. 결국 사람 편에 서는 제도를 고민해주기를 진심으로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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