존 페퍼 ㅣ 미국 외교정책포커스 소장
2000년 11월, 조지 W. 부시와 앨 고어의 대선 대결은 플로리다주 수천표를 놓고 교착에 빠졌다. 고어는 전국 득표에서 이겼지만 대통령 선거인단에서의 승리가 플로리다에 달려 있었다. 그 주에서 부시는 537표 박빙 우위였다. 민주당은 플로리다 재검표를 원했고, 공화당은 원치 않았다. 사건은 대법원으로 갔고, 그해 12월 대법원은 5 대 4의 결정으로 재검표를 중단시키고 부시에게 승리를 안겼다.
같은 시기, 지구 반대편에는 한 젊은 동티모르 운동가가 미국이 후원하는 민주주의 세미나에 앉아 있었다. 그 운동가가 몇년 뒤 나에게 회상하기를, 미국인 연사는 미국 민주주의 모델의 가치를 강연하고 있었다고 한다. 그 운동가는 “죄송하지만, 플로리다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을 고려할 때 왜 우리가 당신이 하는 말을 진지하게 받아들여야 하느냐?”고 물었다. 연사는 제대로 답변하지 못했다.
2000년 대선은 미국 민주주의의 몇가지 결함을 드러냈다. 기이한 선거인단의 불균형적인 영향력, 고도로 정치화된 대법원, 돈과 변호사들과 후원제의 영향력 등이 그것이다. 미국 민주주의는 유권자들의 선택이 아니라 부시의 동생 젭이 플로리다 주지사이고 대법원에서 보수가 근소하게 우위라는 사실로 귀결됐다. ‘1인 1표’라는 민주주의 원칙은 ‘1형제 1대법관’에 짓밟혔다.
부시는 해외에 민주주의를 증진시키는 치어리더로 나섰다. 부시 행정부는 테러리즘과의 전쟁이 아프가니스탄, 이라크, 중동 전체에 민주주의를 가져다준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민주주의 증진 캠페인은 그 나라들에 민주주의가 아니라 전쟁을 가져다줬다.
20년이 지난 오늘, 미국은 ‘미국 민주주의’의 모든 결함들을 다시 보여줄 또 하나의 선거를 마주하고 있다. 그러나 이번엔 2016년 유권자 투표에서 힐러리 클린턴에게 300만표를 진 도널드 트럼프에게 승리를 안겨준 선거인단 제도의 본질적 불공정 문제만이 아니다. 이번에는 트럼프가 거짓말과 투표 절도, 폭력 선동 등 민주주의 제도를 뒤엎고 자리를 계속 지키기 위해 뭐든지 하고 있다.
문제는 미국 선거를 둘러싼 혼란이 세계 민주주의의 미래에 어떤 영향을 미칠 것인가다. 우선, 미국의 민주주의 모델을 밀어붙이려는 시도가 꼭 전세계에 많은 민주주의를 낳았던 것은 아니다. 한국, 남아프리카공화국, 아르헨티나 등에서 보듯 민주주의가 뿌리를 내린 곳은 주로 외국의 조언이 아닌 내부의 노력을 통해 민주주의를 이뤘다.
따라서 미국이 민주주의 증진에서 후퇴한다고 해서 전세계에 큰 영향은 없을 것이다. 오히려 반대 효과가 있을 수 있다. 미국이 외부에서부터 밀어붙이지 않기 때문에 내부의 민주주의 운동가들은 더 이상 친미 스파이라는 비난을 쉽게 받지 않을 것이며, 따라서 활동 공간이 더 커질 것이다.
미국에 대한 민주주의 운동가들의 환멸도 유익할 수 있다. 미국이 현재 평화적인 권력 이양 문제에 사로잡혀 있다는 점은 어떠한 민주주의도 완벽하지 않고, 미국이 도덕적으로나 절차적으로 다른 나라보다 우월하지 않다는 강력한 메시지를 보내고 있다. 다시 말해, 민주주의 운동가들은 미국 아닌 스스로의 힘으로 독재자를 무너뜨리고 민주주의를 구축해야 한다.
이것들은 미국의 운동가들에게도 교훈을 준다. 조 바이든이 다음달 이겨서 1월에 취임하면 미국은 다른 나라의 정치 체제에 간섭하기보다는 미국의 민주주의를 회복하는 데 한동안 집중할 것이다. 트럼프는 선거 보안과 의회 감독, 사법부 독립 등 민주적 메커니즘에 대한 미국인들의 믿음을 약화시키는 데 많은 일을 해왔다. 바이든 행정부는 지난 4년간 추락한 미국과 미 대통령에 대한 최소한의 국제적 존경을 되찾는 일은 말할 것도 없고, 이 같은 민주주의 가드레일을 복구하기 위해 할 일이 많다.
트럼프 4년 이후, 미국 유권자들은 그를 쫓아낼 준비가 돼 있는 걸로 보인다. 트럼프의 미국 민주주의 감퇴시키기가 미친 영향을 지켜본 전세계 사람들이, 트럼프 같은 의제를 추진하는 자국의 정치인들을 거부하기를 희망해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