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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편집국에서] 부동산 세습사회 / 안선희

등록 2020-10-26 17:12수정 2020-10-27 15:10

안선희 ㅣ 경제부장

부동산 광풍이 또 한차례 대한민국 사회를 휩쓸었다. 아직 그 광풍의 한가운데 있는지 끝자락에 있는지는 명확하지 않지만 말이다. 1970년대 후반, 1980년대 후반~1990년대 초반, 2000년대 중반 등 지난 40여년간 몇차례 찾아왔던 부동산 급등기 때처럼 이번에도 승자와 패자가 갈렸다. 일찌감치 흐름에 올라탄 사람은 수억원의 차익을 얻어 미소를 짓고, 그러지 못한 사람은 원망과 질투, 패배감에 시달린다. 더 큰 문제는 이제 성실하게 모은 종잣돈과 타이밍을 맞추는 ‘실력’만으로는 부동산 승자의 대열에 끼기 점점 어려운 시대가 돼가고 있다는 것이다.

자산(부)을 모으는 방식은 두가지다. 자신이 번 소득의 일부를 저축하는 것과 상속·증여를 통해 이전받는 것이다. 월급을 차곡차곡 모아 집을 사기 어려워졌다는 이야기가 하루이틀 된 것은 아니지만, 이제 서울의 집값은 평범한 월급쟁이는 엄두조차 내기 힘든 수준이 됐다. 반면 이미 자산을 소유한 사람은 자산가격 상승에 따라 더 큰 자산을 소유하게 되고, 이렇게 쌓인 자산이 자식 세대로 이전되면서 자산 격차가 재생산되는 현상이 뚜렷해지고 있다. 바야흐로 ‘상속의 시간’이 다가오고 있는 것이다.

국세청의 ‘2014~2018년 세대별 부동산 수증 현황’ 자료를 보면 20대와 30대가 증여받은 주택 또는 빌딩의 증여액은 2014년 9576억원에서 2018년 3조1596억원으로 3.3배 늘었다. 증여 건수도 2014년 6440건에서 2018년 1만4602건으로 2.3배 증가했다.

이른바 ‘영끌’(영혼까지 끌어모은다는 의미의 신조어)로 집을 사는 것도 누구나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한국감정원에 따르면 올해 서울에서 거래된 아파트 평균 실거래가는 8억4400만원이다. 주택담보대출을 받고 상당한 규모의 신용대출까지 받아도 역부족이기 쉽다. 결국 부모의 ‘도움’이 집을 살 수 있는지를 가르게 된다. 부모 세대의 부동산 투자 성공과 실패의 기록인 다큐멘터리 <버블패밀리>를 만든 1989년생 마민지 감독의 말처럼 “신혼부부 가운데서도 양가의 도움을 받고 ‘쌍끌이 대출’(부부 모두 대출받는 것)을 감행할 수 있는 ‘금수저’만이 아파트 막차에 오를 수 있”는(<월간참여사회> ‘영혼까지 끌어모아, 월세 탈출!’) 것이다.

부의 축적에서 상속이 기여한 비중을 연구한 김낙년 동국대 경제학과 교수는 그 비중이 1980년대 37.7%에서 1990년대 이후 29% 안팎으로 떨어졌다가 2010년대에는 다시 38.3%로 높아졌다고 밝혔다.(‘한국에서의 부와 상속, 1970~2014’) 그는 아직은 상속 비중이 높지 않은 편이지만 이는 사망률이 낮고 경제성장률과 저축률이 높아 젊은층이 자산을 축적할 기회가 많았기 때문이라며, 고령화의 진전이 더욱 빨라지는 향후에는 이 요인들이 모두 반대방향으로 작용해 상속 비중의 상승 추세가 한층 가속화할 것이라고 전망했다.

세대 간 자산 이전의 양상을 연구한 이철승 서강대 사회학과 교수와 정준호 강원대 부동산학과 교수 역시 산업화 세대 또는 부동산 시원 축적기 세대(1930년대 전후 출생)의 (자식 또는 손자로의) 자산 이전 활동이 이후 세대 내의 자산불평등을 증가시켰다고 지적한다. 젊은 세대에서 회자되는 이른바 ‘금수저-흙수저’론의 경제적 배경이다. 또한 이 연구는 앞으로 민주화 세대의 상속 활동 역시 산업화 세대 못지않게 활발할 것이라고 예상했다.(‘세대 간 자산 이전과 세대 내 불평등의 증대 1990~2016’)

한국 사회의 계층 이동 가능성이 점점 낮아지고 있다는 우려가 높다. 한편에서는 부모가 사교육, 인맥, 문화자본 등을 통해 자식에게 학벌과 일자리를 물려주는 현상이 뚜렷해지고 있다. 또 한편에선 이보다 더 직접적이고 ‘손쉬운’ 계층의 대물림이 심화하고 있다. 자산을 물려주는 것이다. 설사 자신의 노력과 능력으로 같은 직업, 직장을 얻었다 해도 자산을 물려받은 사람과 그렇지 못한 사람의 삶은 큰 차이가 있을 것이다. 한국에서도 경제학자 토마 피케티가 경고했던 ‘세습사회’의 징후가 나타나고 있다.

sha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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