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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이우진의 햇빛] 이모티콘에 담긴 날씨

등록 2020-11-01 15:54수정 2020-11-02 02:38

이우진 ㅣ 이화여대 초빙교수(과학교육)

글을 써보려고 머리를 쥐어짜다 마침표를 찍으면 안도의 한숨을 쉰다. 같은 점이라도 일기도에서 보면 뜻이 달라진다. 어딘가 비가 오고 있다는 신호다. 점이 하나면 안개 낀 호숫가에 빗물이 여기저기 동그라미를 그리며 퍼져가는 모습이 보인다. 점이 세개 모이면 큰비로 개울의 징검다리가 넘쳐 종아리를 걷어붙이고 건너다 거친 물살에 몸을 가누기 힘들었던 추억이 떠오른다. 점 안에서 비를 보고 있는 누군가의 감정과 경험도 느껴볼 수 있어서다. 날씨의 표정을 전하는 이모티콘인 셈이다.

일기도에는 생소한 기호가 많다. 설탕 표시 같은 별표는 눈의 결정처럼 보인다 치자. 따옴표는 뭔가. 이것이 왜 이슬비를 나타내는지 닮은 구석을 찾아보기 어렵다. 그도 그럴 것이 기상 현상을 나타내는 다양한 표지는 컴퓨터 키보드에서나 볼 수 있는 특수문자를 조합한 것이 많기 때문이다. 이 기호들은 19세기 말 무선 전신과 대량 인쇄 기술이 태동하던 시기에 타자기 자판의 단추를 한두번 눌러 가까스로 날씨를 전해야 했던 시대의 산물이다.

한편 구름 기호는 이집트 상형문자 같다. 뭉게구름처럼 돋아난 것은 뒤집은 U(유) 자로 표시하고, 비단구름처럼 평평한 것은 한줄로 표시한다. 한자를 쓰듯이 펜으로 두세획이면 27종의 구름을 구분해낼 수 있다. 구름을 체계적으로 분류하자는 시도는 그림에서 출발했다. 구름은 햇빛의 각도에 따라 색깔과 질감이 달라질 뿐 아니라 바람에 따라 수시로 형태가 변하므로, 한번 봐두었던 인상이 사라지기 전에 빠른 속도로 그려내야만 한다.

루크 하워드는 런던 주변에서 수십년 동안 하늘을 쳐다보며 구름을 스케치하고 수채화로 담아냈다. 일부를 엄선하여 1803년 에세이로 펴냈다. 구름의 전경에는 목장의 울타리 같은 일상생활의 소재를 함께 그렸다. 성곽이나 들판을 그림에서 구별할 수 있듯이, 구름도 유형별로 쉽게 구분할 수 있다는 암시였다. 주석을 달아 구름의 특징을 상세하게 설명한 건 과학이었지만, 그림에는 여전히 자연의 아름다움이 배어나 있었다.

구름을 분류하는 방식은 학자마다 다를 수 있었겠지만, 당시 유럽 사회는 그림을 통한 과학의 소통 방식에 큰 호응을 보인 것 같다. 목동의 뒷모습을 배경으로 멀리 지평선까지 드리운 양떼구름에는 한가로움이 들어 있다. 아이를 안고 웅크린 여인의 뒤로 번개의 섬광과 함께 높게 솟은 먹구름에는 격정과 근심이 가득하다. 순간을 포착하는 데 뛰어난 사진기가 발명된 뒤에도, 구름 책자에 풍경화와 사진을 나란히 배치하는 관행은 19세기 내내 이어졌다. 괴테가 구름 에세이를 칭송하는 시를 써서 하워드는 유명해졌고, 그가 제안했던 구름 분류 뼈대는 지금까지 살아남았다.

서양에서는 식물종을 세분하듯이 구름을 요리조리 뜯어보고 빛을 해부하느라 요란했던 시기에, 우리 선조들은 시공의 경계를 초월한 듯 산수와 조화를 이루는 평평한 구름이나 안개를 즐겨 그려냈다. 하늘에 닿을 듯 거친 소나기구름도 높이 나는 매의 눈으로 바라보면 한갓 작은 언덕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사나운 폭풍우도 한시적일 뿐이고 머지않아 수증기로 분해되어 여백으로 가득한 허공으로 되돌아갈 터이다.

하늘 상태는 오감으로 느껴야 하는 만큼 사람의 손길이 필요한 관측 영역이지만, 자동화 추세와 맞물려 기상위성이 내려다본 구름 영상을 받아보면서, 일기도에서 구름 기호가 하나둘 사라져가는 것은 아쉬움으로 남는다. 도심의 바쁜 일과 중에 눈앞의 숙제나 걱정에 쪼들리다 보면 하늘을 쳐다볼 여유가 없다. 하지만 그 순간에도 하늘에는 프레임에 갇힌 풍경이나 아이맥스 영화와는 비견할 수 없는 파노라마가 펼쳐진다. 자연이 주는 소소한 즐거움은 늘 우리 곁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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