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범선|가수·밴드 ‘양반들’ 리더
수염이란 무엇인가? 나는 어릴 적부터 수염을 기르고 싶었다. 로큰롤에 빠지고 나서부터는 특히 수염에 장발인 예수 스타일 록스타들을 동경했다. 존 레넌, 짐 모리슨 등등. 하지만 중고등학생 때는 두발 규제가 있었다. 대학생 때 비로소 기르기 시작했다가, 취업을 하니 눈치가 보여서 잘랐다. 군대에서는 아예 삭발하고 지냈다. 한국에서 신체 건강한 이성애자 남성으로서 겪는 억압은 많지 않았다. 나는 그중 모발에 대한 통제가 그나마 가장 원초적인 부자유로 느껴졌다. 수염이란 내게 자유의 상징이었다.
제대 후, 나는 수염과 머리를 다시 길렀다. 예술가 겸 자영업자로 살았기 때문에 눈치 볼 일이 없었다. 마음껏 나의 털을 휘날렸다. 점점 천원, 오천원, 만원 지폐 속 인물로 변해갔다. <삼국지> 속 관우처럼 수염을 만지작거리는 습관이 생겼다. 드디어 내가 원했던 자유를 만끽했다.
하지만 턱밑 털이 무거워질수록 나를 보는 시선도 무거워졌다. ‘선생님’이라 불리기 시작했다. 물론 한국 나이로 이제 서른이고 여기저기 강연도 하러 다니니 그럴 수 있지만, 보통 ‘범선씨’나 ‘손님’ 정도로 불릴 법한 상황에서도 ‘선생님’이 되어버렸다. 내가 30대 후반이나 40대 초반이라고 짐작하는 분들이 많았다.
수염은 내게 더 이상 자유의 상징이 아니었다. 전통적인 남성성의 체현이었다. 내가 ‘양반들’이라는 밴드를 하고 ‘성균관’ 앞에서 책방을 하는 것도 도움이 안 됐다. 진짜 선비가 되기 위해 안간힘 쓰는 한국 남성으로 해석될 여지가 농후했다. 친구는 내 수염을 보고 “남근이 꽁꽁 뭉쳐 있다”고 비판했다. 나는 허허 웃었지만 부정할 수 없었다.
의도는 중요치 않았다. 콘텍스트가 전부였다. 아무리 내게 자유인 것도 사회적으로는 특권일 수 있었다. 갑자기 수염에서 해방되고 싶었다. 학교와 직장과 군대의 눈치를 보느라 매일 아침 면도를 해야 했던, 그 알량한 억압으로부터 자유롭고 싶어서 수염을 길렀다면, 이제는 내 얼굴에 달린 남근과 자의식과 권위로부터 자유롭고 싶었다.
그러다 얼마 전, 한 전시에 갔다. 남성이 남성을 왁싱하는 과정을 관람객이 지켜보는 실험적인 기획이었다. 나는 이름 모를 인간의 음부에서 털이 뽑히는 과정을 음미하면서 “따갑겠다”와 “통쾌하다”를 동시에 느꼈다. 그리고 무엇보다 깔끔하니 아름다웠다. 바로 그날 밤, 나는 면도기를 들었다. 쇄골까지 내려왔던 수염을 모두 밀고, 앞머리도 싹둑 잘랐다.
나의 면도 전후, 세상이 나를 대하는 태도가 바뀌었다. 못 알아보는 이가 많았고, 이상하다는 사람도 있었다. 단발에 앞머리가 생기니 ‘귀엽다’는 말을 많이 들었다. 머리 크고 나서 처음으로 ‘예쁘다’는 평까지 받았다. 만질 수염이 없어서인지 거드름을 덜 피웠고, 무의식중에 뒷짐 지고 걷는 일도 줄었다. 결과적으로 ‘선생님’이라 불리는 일이 드물어졌다.
내가 원하든 원하지 않든, 나의 면도는 ‘덜 남성-되기’를 수행하는 것이었다. 8년 전, 비슷한 경험을 한 적이 있다. 대학 새내기 때 나는 조정부에 가입하여 몸 키우기에 열중했다. 아침저녁으로 운동을 하며 막대한 양의 고기, 생선, 우유를 소비했다. 그러다 동물권에 눈을 뜨고 채식을 시작하면서 10㎏이 빠졌다. 조정부도 탈퇴했다. 그 뒤로 “남자가 고기를 안 먹어서 힘을 못 쓴다”는 헛소리를 귀에 달고 살았다.
나의 자유는 결국 나의 일상적 퍼포먼스가 얼마나 해방적이냐에 달렸다. 그리고 그 퍼포먼스의 의미는 나의 의도가 아닌 사회문화적 구조가 정의한다. 아무리 자유로운 행위도 특권이라면 해방적이지 못하다. 면도와 채식은 그래서 내게 일맥상통한다. 매일 아침, 하루 세끼 벌이는 나만의 퍼포먼스가 나를 자유롭게 하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