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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정찬의 세상의 저녁] 전태일 생각

등록 2020-11-17 14:54수정 2020-11-18 02:09

‘나의 전체의 일부’라는 표현은 전태일의 세계관을 관통하는 개념이다. 일기장 곳곳에 타인을 ‘나의 전체의 일부’ 혹은 ‘나의 또 다른 나’라고 부르고 있다. 이런 세계에서는 모든 사람이 서로가 서로에게 ‘전체의 일부’가 된다. 한 사람의 고통이 모든 사람의 고통이 되는 것이다.
일러스트레이션 노병옥
일러스트레이션 노병옥

정찬│소설가

전태일 50주기 추도식이 11월13일 경기도 남양주시 모란공원 전태일 묘역에서 열렸다. 이날의 추도식은 전태일의 희생적 생애에 대한 추모이면서, 택배노동자의 과로사로 드러난 참담한 노동 현실 속에서 노동과 생명의 가치를 다시 일깨우는 간절한 의식이기도 했다. 일터에서 죽어간 비정규직 50명의 영정들과 태안화력발전소 하청 노동자로 일하다 숨진 김용균의 어머니 김미숙 ‘김용균재단’ 이사장이 추도식을 지켜보았다.

“나를 버리고, 나를 죽이고 가마. 조금만 참고 견디어라. 너희들의 곁을 떠나지 않기 위하여 나약한 나를 다 바치마.”

스물두살의 청년 전태일은 위의 글을 쓴 지 3개월 후인 1970년 11월13일 근로기준법과 함께 자신의 몸을 스스로 태웠다. 생명이 꺼져가는 순간에도 그가 거듭 외친 말은 “내 죽음을 헛되이 하지 말라”였다.

전태일이 근로기준법을 알게 된 것은 아버지를 통해서였다. 아버지가 젊은 시절 대구 방직공장 노동자 총파업에 참여한 사실을 알고 있었던 전태일은 어느 날 그 일에 대해 물었다. 아들이 노동운동에 관심이 많다는 사실을 알게 된 그는 깜짝 놀랐다. 그의 세대에게 노동운동은 빨갱이라는 말과 연결된 금기어였다. 그런 일은 알 필요 없다고 내쳤음에도 전태일이 집요하게 묻자 침묵보다 노동운동이 얼마나 위험한 행위인지를 알려주는 게 더 낫겠다는 판단으로 이야기하다 근로기준법이 입에 오른 것이었다.

‘근로시간은 1일 8시간 1주일에 48시간을 기준으로 하며, 합의의 경우 1주일에 60시간 한도로 한다’는 근로기준법 규정을 본 전태일은 평화시장 노동자들이 1일 14시간, 1주일에 98시간 이상 노동하는 현실을 떠올리며 전율했다. 노동자를 위한 법이 있다는 사실을 까맣게 몰랐던 자신들이 정말 바보라고 생각한 그는 1969년 6월 평화시장 재단사 모임 ‘바보회’를 조직하고, 근로기준법에 맞는 근로조건 실현과 노동조합 결성을 목표로 정했다.

전태일은 어머니가 빚내어 마련한 돈으로 <근로기준법 해설서>를 구입해 틈만 나면 읽었다. 가난으로 학교를 제대로 다니지 못한 그에게 법학의 개념과 용어가 어려워 “대학생 친구가 있었으면 원이 없겠다”는 말을 입버릇처럼 했다. ‘바보회’ 활동을 한 지 얼마 되지 않아 전태일은 해고당했다. 게다가 업주들에게 ‘위험인물’로 낙인찍혀 평화시장에서는 취업할 수 없게 되었다. 그는 평화시장 노동실태 조사 결과를 들고 시청 근로감독관을 찾았다. 근로기준법 준수를 감독하고, 위반 업체를 고발하는 근로감독관은 그에게 큰 희망이었다. 하지만 ‘서류를 두고 가라’는 말밖에 듣지 못한 채 거의 쫓겨나다시피 했다. 엄청난 충격 속에서도 희망을 버리지 못하고 노동청을 찾아갔으나 실태 조사 한번 하고는 연락이 없었다. 그제야 전태일은 싸움의 대상이 기업주만이 아니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참혹한 노동 현실을 사회구조의 일부로 받아들이는 체제의 폭력성이 비로소 눈에 보였던 것이다.

절망 상태에서 두달가량 공사판에서 일했다. 거기에서도 평화시장에서처럼 현실의 폭력을 고스란히 겪은 그는 1969년 9월 친구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얼마나 위로해야 할 나의 전체의 일부냐! 얼마나 불쌍한 현실의 패자냐! 얼마나 몸서리치는 사회의 한 색깔이냐!”라고 당시의 심정을 강렬히 표현했다.

‘나의 전체의 일부’라는 표현은 전태일의 세계관을 관통하는 개념이다. 일기장 곳곳에 타인을 ‘나의 전체의 일부’ 혹은 ‘나의 또 다른 나’라고 부르고 있다. 이런 세계에서는 모든 사람이 서로가 서로에게 ‘전체의 일부’가 된다. 한 사람의 고통이 모든 사람의 고통이 되는 것이다. 그 표현에 이어 죽음에 관한 표현들이 그해 11월부터 일기장에 나타난다.

“그 순간이 지나면 그 후론 거짓이 존재하지 않네. 그 후론 아주 완성된 백(百)일세. 그 순간은 영원토록 존재하는 거니까 전후(前後)는 염려 없네…….”

그가 삼각산 임마뉴엘 수도원 신축 공사장 인부가 된 것은 1970년 4월이었다. 넉달 후 마침내 마음의 결단을 내린 그는 오랜만에 일기를 썼다.

“이 결단을 두고 얼마나 오랜 시간을 망설이고 괴로워했던가? 지금 이 시각 완전에 가까운 결단을 내렸다. 나는 돌아가야 한다. 꼭 돌아가야 한다. 불쌍한 내 형제 곁으로, 내 마음의 고향으로, 내 이상의 전부인 평화시장의 어린 동심 곁으로.”

9월이 되자 평화시장에 나타난 전태일은 11월13일 분신을 결행하기까지 절망의 벽을 깨뜨리기 위해 최선을 다한다. ‘바보회’를 해체하고 ‘삼동친목회’라는 새 조직을 만든 후 평화시장의 참상을 알리기 위해 언론사를 방문하고, 기업주 대표기관을 찾아가 항의하고, 대학생들만이 할 수 있는 일이라 생각했던 시위까지 했으나 현실의 벽은 완강했다. 싸우면 싸울수록 벽이 더 두꺼워져가는 것을 절실히 느낀 전태일은 친구에게 보내는 편지 형식의 유서에서 이렇게 썼다.

“나를 아는 모든 나여. 나를 모르는 모든 나여. 부탁이 있네. 지금 이 순간의 나를 영원히 잊지 말아 주게. 그리고 바라네. 그대들 소중한 추억의 서재에 간직하여 주게. 뇌성 번개가 이 작은 육신을 태우고 꺾어버린다 해도, 하늘이 나에게만 꺼져 내려온다 해도 그대 소중한 추억에 간직된 나는 조금도 두렵지 않을 걸세. 그리고 만약 또 두려움이 남는다면 나는 나를 영원히 버릴 걸세. 그대들이 아는, 그대 영역의 일부인 나. 그대들의 앉은 좌석에 보이지 않게 참석했네.”

여기에서 ‘그대’는 노동운동을 함께한 친구이면서, 동시에 노동운동을 하는 모든 이들이다. 그러니까 노동운동이 이루어지는 곳이면 죽음 이후에도 달려가겠다는 뜻의 표현이다. 이 말을 미래시제로 하지 않고 ‘참석했네’라는 과거시제로 한 것은 죽음을 돌이킬 수 없는 행위로 받아들였다는 표징이다. 이 표징은 자유의 힘에 둘러싸여 죽음을 초월하고 있는 전태일의 아름다운 모습을 떠올린다.

전태일의 죽음 이후에도 한국 사회는 자본의 이익을 합리적으로 분배하려는 노력을 제대로 한 적이 없다. 노동의 가치는 노동자의 삶의 질과 직결될 뿐 아니라 생명의 문제로 이어진다. 노동의 가치에 대한 사회의 합리적 평가는 자본주의를 건강하게 하는 길이자, 전태일의 죽음을 헛되게 하지 않는 유일한 길인 것이다.

전태일 50주기 추도식에, 보이지 않는 전태일은 비정규직 50명의 영정들과 김용균의 어머니 사이에 가만히 앉아 “인간답게 살고 싶다, 일하다 죽지 않게 비정규직 철폐하라”는 노동자들의 외침을 깊은 슬픔 속에서 귀 기울이고 있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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