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한민 ㅣ 작가·시셰퍼드 활동가
그레타 툰베리라는 리트머스 시험지가 있다. 이 청소년 환경운동가를 아는 사람들은 그의 말을 경청하는 이와 폄하하는 이로 극명하게 나뉜다. 내 관찰에 의하면 후자에는 중장년 남성이 많다(도널드 트럼프가 대표적이다). 지난달 <한겨레>의 툰베리 인터뷰 기사는 이 시험지의 ‘효험’을 확인한 좋은 예였다. 기후위기의 심각성을 아는 이들에게 그레타의 말은 구구절절 상식이라 고맙거나 미안하다는 반응이 많았던 반면, ‘반대 진영’의 반응은 몇가지 유형으로 정리할 수 있었다.
(1)“배후세력이 조종하는 꼭두각시다.” 근거 없는 낭설이다. 그녀는 아무도 주목하지 않고, 아무도 시키지 않고, 아무도 나서지 않을 때 홀로 의회 앞에서 기후위기 등교거부 시위를 시작했고 지금도 독립적으로 활동한다. (2)“어리다. 공부할 나이다.” 공부는 그의 비판자들이 해야 한다. 그의 발언을 주의 깊게 살펴보면 그가 실제로 기후 관련 핵심 보고서들을 정독했음을 알 수 있고, 직업 환경운동가가 봐도 정확한 지식과 근거를 바탕으로 하고 있으며, 그 자신이 강조하듯 새로운 말이 아닌 과학자들이 수십년간 경고한 내용들이다. (3)“잘사는 나라 출신 백인으로 특혜를 누린 주제에.” 툰베리는 기후위기가 취약계층에게 더 큰 피해를 입히며 불평등을 심화시킬 것임을 잘 안다. 그래서 그의 비판도 고국인 스웨덴 같은 부유국, 지도자·기득권층을 겨냥해 더 큰 책임을 강조한다. (4)“아스퍼거증후군 환자다.” 그래서? 정신장애에 대한 편견을 노출하는 반응이다. (5)“미디어가 만들어냈다.” 모든 운동처럼 기후 운동도 얼굴이 필요했다. 북극곰으로는 부족했다. 몇가지 운이 맞아떨어졌다. 기후변화는 점점 심각해졌고, 전 연령층이 쉽게 접할 수 있는 관련 정보들이 쏟아졌고, 이를 숙지한 그녀가 나타나 특유의 직설화법으로 정체된 기후 담론에 불을 지폈다. 기후 이슈에 우호적인 매체·기관들이 그에 열광해 그의 존재감이 증폭된 건 사실이지만, 그게 문제라면 가령 말랄라 유사프자이가 최연소 노벨평화상을 수상한 것도 문제인가? 대중적 ‘상징’에 언론이 주목하는 건 당연하며, 달보다 달을 가리키는 손가락을 보는 일부 미디어의 생리는 별개의 문제이다. (6)“이중적이다.” 기껏해야 일회용 플라스틱을 몇번 썼고 그의 조력자 중 몇명이 비행기를 탔다는 정도인데, 그 정도면 웬만한 어른보다 훨씬 언행이 일치한다. 치졸한 흠집잡기 그만하고 자신부터 돌아보자. (7)“건방지다.” 사람들은 메시지가 거슬리면 메신저를 공격한다. 그레타 이전에 기후에 관해 공손하고 ‘아이답게’ 발언한 이들은 많았지만, 아무도 귀담아듣지 않았다. 툰베리는 어른들의 체면 따윈 안중에 없다. 진실에만 관심 있다. 그래서 기성세대를 벌거숭이 임금으로 만들었으니 부끄러운 게 당연하다. 문제는 수치를 반성으로 전환시킬 줄 몰라 역공격하는 어른들이다. 일부는 인신공격을 넘어 성희롱까지 하는 등 못 봐줄 수준인데도, 그는 의연하게 기후 담론 확산에 집중한다. 앞으로 그가 어떻게 변모할지 몰라도, 주변부에 머물던 기후 이슈를 이만큼 알린 공로만으로도 세계인들이 감사해야 한다.
그레타가 거슬리는 이들이, 나는 거슬린다. 유·청소년을 대하는 사회의 보수성을 보여주기 때문에. 만약 한국의 청소년 기후활동가가 같은 말과 행동을 했다면 ‘그레타'가 될 수 있었을까? 청소년들이 스포츠·연예를 통해 ‘국위선양’할 땐 환호하지만 그들이 자기 생각을 가감 없이 피력하는 순간 반드시 논란이 일고 ‘보복’이 시작되는 나라에선, 누가 들어도 불편하지 않을 얘기만 나온다. 가령 “꿈을 꾸세요!” 같은. 이대로 가면 꿈을 추구할 미래 자체가 없다는 진실을 밀레니얼들이 외칠 때, 우리 ‘꼰대’들이 갖출 수 있는 최소한의 예의는 경청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