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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전치형의 과학 언저리] AI 자동화, 인간의 대체인가 보조인가

등록 2020-11-26 16:58수정 2020-11-27 14:03

택배 상자에 손잡이 구멍을 뚫는 것은 자동화된 택배 시스템을 인간을 대체하기 위한 기술이 아니라 인간을 보조하기 위한 기술로 활용하려는 시도다.

전치형 ㅣ 카이스트 과학기술정책대학원 교수·과학잡지 <에피> 편집위원

지난주 미국의 매사추세츠공과대학(MIT)에서 <미래의 일>이라는 제목의 보고서를 발간했다. 2018년 봄부터 공학과 사회과학을 망라하는 열두 학과 스무명 넘는 교수가 참여한 연구의 결과물이다. 연구를 시작할 무렵에는 인공지능과 로봇이 인간의 일자리를 모두 빼앗을 것이라는 우려가 한창이었다. 한국에서도 2016년 봄의 알파고 충격 이후 앞으로 사라질 직업의 목록이 관심을 끌었다. <미래의 일> 보고서는 그런 충격과 공포가 지나간 뒤 현실을 차분히 점검해보려는 시도다. 인공지능과 로봇을 통한 자동화는 과연 인간의 일을 없애는가? 연구와 노동의 현장에서 실제로 일어나고 있는 변화는 무엇인가?

보고서는 “자동화 때문에 세상이 뒤집히지는 않았다”라고 말한다. 그동안 기술이 많이 발전하긴 했지만, 인간이 쓸모없어져서 노동시장에서 사라지는 일은 생기지 않았다. 대신 보고서는 발전으로 인한 “과실의 분배가 너무나 불평등하게 최상위 집단으로 쏠려 있어서 노동자 다수는 겨우 한 입 맛볼 수 있었을 뿐”이라고 지적한다. 현재의 불평등한 노동 현실은 기술 발전의 필연적 결과가 아니라 잘못된 제도와 정책의 산물이라는 것이다.

‘테크놀로지와 혁신’을 다루는 보고서의 제3장은 밋밋하기도 하고 참신하기도 한 연구 결과를 제시한다. 첫째는 인공지능과 로봇이 안전 문제가 중요한 일이나 본격적인 생산과정에 투입되는 데에는 시간이 상당히 걸린다는 사실이다. 인공지능과 로봇은 아직 복잡다단한 현실에서 충분히 검증되지 않았다. 둘째는 신기술이 인간의 일을 대체할 수도 있고 보조할 수도 있는 두 가지 방향이 열려 있다는 것이다. 대체와 보조 중 무엇을 지향하는지는 사회적 선택의 문제다. 셋째는 기술을 선택하고 활용하는 방식이 조직에 따라 크게 달라질 수 있다는 것이다. 기술 자체의 논리가 특정한 방식을 강제하는 것이 아니라 조직이 설정하는 틀 안에서 기술이 자리를 잡아 나간다.

약속했던 날짜가 계속 뒤로 미뤄지고 있는 자율주행차가 좋은 사례다. 자율주행 알고리즘이 상당한 수준에 이르긴 했지만 모든 환경과 상황을 다 감당하면서 안전을 확보하는 단계에는 아직 도달하지 못했다. 보고서는 2030년쯤 되어야 제한적인 범위에서 자율주행 시스템을 활용하게 될 것이라 예측하고, 전면적인 자율주행 도입은 더 오래 걸릴 것으로 전망한다. 지금도 운전자를 보조하는 기술로 잘 활용할 수는 있지만, 운전자를 완전히 대체하는 것은 아직 먼 얘기다. 과연 운전자를 대체하는 것이 최선인지는 기업, 정부, 시민사회 사이에 치열한 논쟁이 필요하다.

이번 주 널리 보도된 우체국 택배 상자 손잡이 구멍 뚫기 문제를 엠아이티 보고서의 관점으로 평가해보면 어떨까. 무거운 택배 상자를 들고 옮기느라 근골격계 질환에 시달리는 우체국과 택배 노동자들의 존재는 인공지능 알고리즘을 활용하는 물류 혁명이 아직 인간의 안전을 확보하지 못한 불안정한 단계에 있다는 증거다. 더 짧은 시간에 더 많은 물건을 옮겨주겠다는 약속은 이들의 허리와 어깨를 망가뜨려야만 지킬 수 있다. 그런데도 손잡이 구멍 좀 뚫어달라는 요구를 지금까지 외면한 것은 이들을 조만간 자율주행 택배 차량과 드론으로 대체될 존재로 보았기 때문은 아닐까.

택배 상자에 손잡이 구멍을 뚫는 것은 자동화된 택배 시스템을 인간을 대체하기 위한 기술이 아니라 인간을 보조하기 위한 기술로 활용하려는 시도다. 무인 배달이라는 혁명은 아직 기미가 보이지 않는 지금, 꼭 필요한 혁신은 택배 기사를 대체하는 것이 아니라 이들을 제대로 보조하는 방법을 찾아내는 데에 있다. 손가락이 들어갈 구멍의 최적 위치를 결정하고, 이물질 유입을 막기 위해 안으로 접히는 반구멍 형태를 고안하고, 상자 재질을 바꾸는 등의 노력이 그런 혁신의 과정이다(<한국일보> 보도). 국회와 과학기술정보통신부와 우정사업본부가 협의하고 실행함으로써 손잡이가 있는 택배 상자라는 작은 혁신을 이룰 수 있었다.

<미래의 일> 보고서에 담긴 교훈은 이런 것이다. 자동화 기술은 하루아침에 세상을 바꾸지 않는다. 4차든, 5차든 혁명은 점진적으로만 올 것이며, 그러므로 우리에게는 아직 현명한 결정을 내릴 시간이 있다. 인공지능으로 생산성을 높이는 동시에 그 시스템 속에서 인간이 인간적으로 일할 수 있는 자리를 마련하는 일은 여전히 가능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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