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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조해진의 세계+] 정유림‘들’에게 보내는 마음

등록 2020-11-29 18:11수정 2020-11-30 02:39

조해진 ㅣ 소설가

날이 추워지면 마음의 체온도 내려가곤 한다. 의욕이랄지 기대감의 온도가 바깥 기온처럼 내려가는 것인데, 당연히 체온계로는 확인할 수 없다. 올해는 코로나19라는 변수도 생겼다. 사회적 거리두기 2단계가 시행되면서 그러지 않아도 짧은 내 동선은 이제 거의 집 안에만 국한되었고, 타인과 부대낄 일이 줄어드니 마음속 온도는 더 내려갈 수밖에 없었다. 올해 상반기에 자살한 20대 여성이 전년도에 비해 43%나 늘었다는 슬픈 기사를 본 날에는 그 숫자 속에 수렴된 한명 한명의 얼굴이 상상되어 무너지듯 가슴이 아팠다. 기사는 젊은 여성들의 자살이 실업률과 열약한 노동조건에 있다고 분석했다. 20대 여성들의 상당수는 서비스 업종에서 일자리를 얻는데, 코로나 시대에서는 이 서비스 업종이야말로 고용이 유동적이고 해고도 쉬운 것이다.

임솔아의 단편소설 <병원>(소설집 <눈과 사람과 눈사람>)의 주인공 정유림은 이 시대 고단한 청년의 메마른 현실을 보여준다. 파티시에(제과제빵사)를 꿈꾸며 베이커리 아카데미에 다니던 유림은 아카데미 대표가 운영하는 수제 햄버거 가게에 일손으로 차출되었다가 튀김기를 망가뜨리게 되고, 대표로부터 사고 무마용으로 6개월의 무급 근무를 제안받는다. 혼자 생계를 꾸려야 했으므로 돈 없는 생활이 불가능한 유림은 현실로부터 도피하고자 감기약을 120개나 삼켰지만 다행히 병원에서 깨어난다. 그런데 이 다행은 얄궂다. 의료보험 혜택을 받기 위해(자살 시도는 보험 혜택을 받을 수 없으므로), 그리고 베이커리 아카데미를 수료하기 위해(병원비를 납부해야 퇴원이 가능하므로), 스스로 정신질환이 있다고 증명해야 했던 것이다(정신질환 진단서가 있으면 자살 시도도 보험 혜택을 받게 되므로). 유림은 정신과 의사를 여러 번 찾아간 끝에 결국 진단서를 받아 퇴원하게 되지만 이 진단서는 유림의 미래에서 장애가 될 확률이 높다.

만 열여덟살 생일을 앞둔 정유림의 이 처절한 이야기를 읽으며, 수강생을 노동자로 차출하여 충분한 교육과 실습도 없이 위험한 튀김기를 운용하게 하는 기성세대의 욕심과 자살까지 생각한 사람의 절박한 처지보다는 원칙만을 내세우는 제도의 결함에 대해 생각했다. 유림은 본인의 힘으로 제대로 삶을 꾸리려고 애쓰던 인물이다. 살고 싶어 하던 어린 노동자였다. 그런 유림이 기성세대의 욕심과 제도의 허점으로 궁지에 몰리게 되었고, 미래에서의 공정한 위치마저 잃게 된 것이다. 유림은 물론 소설 밖에도 무수히 많다. 이십대 여성의 자살률이 43%나 증가했다는 통계가 바로 그 증거일 것이다.

한 달여 전, 오랜 취준 생활 끝에 취업에 성공한 후배가 전화를 걸어와 곧 사직을 하려 한다고 밝혔을 때, 그리고 그 이유가 다름 아닌 사측에서 근로계약서를 써주지 않아서라고 했을 때, 나는 당장 그만두라는 말을 차마 하지 못했다. 또다시 취준 생활로 돌아간 후배가 고생할까 봐 걱정되어서라고, 스스로에게 그렇게 변명하며 시간을 보냈다. 그사이 후배는 당당히 직장을 그만뒀고 다행히 근로계약서가 마련된 새 직장을 찾았다. 부끄러웠는데, 누구에게 그 말을 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선배 작가와 통화하면서는 행복과 불행에는 총량의 법칙이 있다는 말을 들었다. 나는 그 말을 지금껏 불행했던 사람은 남은 삶에서는 행복을 누려야 한다는 메시지로 해석했다. 그러나 그 메시지가 현실이 되려면 혼자서는 감당하기 힘든 불행 속에 내던져진 정유림들을 한번 더 살펴보고 제도의 허점을 보완하는 과정이 필요할 것이다. 어쩔 수 없이, 혹은 죽지 못해 사는 것이 아니라 더 많이 웃고 더 많이 행복해지기 위해 사는 것, 그것이 이 시대 정유림들에게 기성세대와 제도가 희망이라는 이름으로 돌려주어야 할 삶의 조건이리라.

이번 주에는 후배에게 너의 선택이 자랑스럽다고 문자라도 보낼 계획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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