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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기고] 성미산이 비자림로 숲에게 / 오연재

등록 2020-12-10 18:16수정 2020-12-18 16:10

오연재 l 서울 성미산학교 포스트중등 12학년

나는 15년째 서울 성미산 마을에서 살고 있다. 초등학교 2학년 때 성미산의 한쪽인 잣나무 숲에 홍익여중·고가 들어선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산이 깎이고 나무가 베어질 때 증인으로 거기에 내가 있었다.

성미산학교에서 선후배를 나누는 공통 기억 중 하나가 바로 잣나무 숲에서 놀았던 경험이다. 나는 여전히 잣나무 숲을 기억한다. 거기에서 친구들과 뛰어놀고 마을 사람들과 함께 모여 축제를 벌이던 시간을 추억한다. 이제는 오색딱따구리를 찾겠다며 성미산을 돌아다니거나, 잣을 주우러 가는 일 따위는 일어나지 않는다. 나의 어린 시절은 잣나무 숲이 사라짐과 동시에 후배들과 공통의 경험으로 공유되지 못하고, 10대임에도 불구하고 어느새 ‘라떼’가 되어버렸다.

끝내 우리는 성미산을 지켜내지 못했다. 한마음을 가진 사람들과 매주 촛불을 들고 거리에서 문화제를 진행하고 산에 텐트를 치고 농성을 했다. 전기톱 소리가 들려오면 수업을 멈추고 산에 올랐다. 어린 나이에도 성미산을 지키기 위해 그 자리에 함께했다. 성미산은 나에게 친구와 같은 존재였기에 잣나무 숲을 지키고 싶었다. 성미산을 지킬 수 있을 거라 믿었다. 하지만 불도저로 전기톱으로 나무가 베어지고 산이 깎이는 장면을 직접 목격하고 나니 결국에는 지킬 수 없을 것 같다는 무서움이 찾아왔다. 잣나무 숲이 없어지고 그 자리에 학교가 들어설 것이라는 불길한 예감은 이미 우리 안에 자리 잡고 있었다. 하지만 그 시간 속에서 산에 텐트를 치지 않았다면, 산을 지키지 않고 그만두었다면 정말 지킬 수 있는 게 세상에 하나도 없을 것이라고 배웠을 것이다.

다행히 마을 사람들은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멈추지 않았다. 어른들은 우리에게 미안하다며 개발논리로 싸움에서는 졌지만, 숲을 지키고자 하는 마음은 지지 않았다고 했다. 그래서 우리는 성미산과 나무에게 잘 가라는 인사를 나누고 지키고자 하는 마음을 다시 되새기기 위해 100인 합창단을 만들어 함께 노래를 불렀다. 초등 때 가장 싫어하는 수업이 무엇이냐 물으면 음악 시간이라 말할 정도로 노래 부르는 것을 싫어했지만, 100인 합창단에서 함께했던 시간은 소중했다. 성미산과 나무에게 편지를 보내는 마음으로 노래를 불렀다.

그렇게 시간이 흐르고 나는 숲을 지키고, 나무를 심고 싶은 10대가 되었다.

지난해에 이어 올해 가을, 비자림로 도로확장 공사가 중단된 곳을 찾았다. 오랜만에 찾은 비자림로 숲은 여전히 고요했고, 하늘로 길쭉하게 뻗은 삼나무는 그늘을 만들어주었다. 작년과 달라진 것이 있다면, 도로확장 공사로 나무가 베어진 땅에 새로운 생명이 자랐다는 것이었다. 삼나무들이 스스로 씨앗을 틔워 나무가 자라고 있었다. 잠시 공사가 중단된 비자림로 숲은 회복 중이었다.

회복 중인 비자림로 숲이 더는 파괴되어서는 안 된다. 나무도 새도 노루도 살아갈 보금자리가 필요하다. 비자림로뿐 아니라 제주 곳곳이 난개발 위기에 처해 있다. 개발이라는 이름으로 자연을 착취하고 파괴하고 있다.

아름다운 구럼비 바위는 해군기지에 가려졌고, 지하수 보전 1등급에 해당하는 숨골은 막히고 있다. 제2공항 건설을 위해 성산읍의 5㎢에 달하는 면적이, 리조트를 짓기 위해 송악산이, 도로확장 공사를 위해 비자림로 숲이 없어질 위기에 처해 있다. 동물테마파크가 들어온다는 조천읍 선흘리 4159번지 일대는 유네스코 세계자연유산인 거문오름이 아주 가까운 거리에 있다. 또 4·3항쟁의 역사적인 공간은 관광지로 만들어버리고 있다.

도시는 개발되었지만, 제주는 생명과 평화의 섬으로 나아가야 한다. 성미산의 잣나무 숲은 사라졌지만, 성미산을 지켰던 마음으로 비자림로를 함께 지켜나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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