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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김민형의 여담] 수학의 인문적인 얼굴

등록 2020-12-16 18:36수정 2020-12-17 02:36

국제수학올림피아드에 참여한 젊은 수학자들. 고등학생이 대상이고 스무살이 넘어선 안 된다. EPA 연합뉴스
국제수학올림피아드에 참여한 젊은 수학자들. 고등학생이 대상이고 스무살이 넘어선 안 된다. EPA 연합뉴스

2018년에 발행된 필자의 책 <수학이 필요한 순간>의 영어판을 최근에 준비해야 해서 내가 얼마나 우리나라 특유의 독자 문화를 염두에 두고 원본을 썼던 것인지 깨닫는 계기가 되었다. 영어 버전으로는 뜻이 불분명하거나 바뀌는 현상도 일어나지만 무엇보다도 동기부여가 뚜렷하지 않은 내용이 너무나 많다는 느낌이었다. 수학이란 딱딱한 진리를 다루는 학문이라는 관점에서 이런 이야기를 의아하게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을 것이다. 그렇지만 무엇에 관한 책이든 궁극적으로 독자는 저자가 자신과 많은 관심사를 공유한다는 믿음이 어느 정도 필요할 것이다. 즉, 세상에서 무엇이 중요하고 무엇이 재미있는지에 대한 착상이 비슷해야 한다는 뜻이다. 여기서 문화의 영향이 당연히 나타나고 수학에 관한 책도 이런 제약을 벗어날 수 없다.

영어권 독자들의 반응을 예상하면서 생기는 구체적인 걱정도 여럿이었다. 예를 들자면 우리나라 독자에 비해서 수학 공식을 훨씬 싫어할 것이 분명했다. 스티븐 호킹이 <시간의 역사>를 쓰면서 ‘공식 하나 보일 때마다 매출이 반 줄어들 것’이라는 충고를 받고 나서 유명한 아인슈타인 등식 E=mc² 하나만 책에 넣었다는 이야기가 생각났다. 그에 비해 나는 공식을 비교적 자유롭게 썼음에도 우리나라 독자들은 상당히 너그럽게 받아들여 주었다. 책을 쓸 때만이 아니라 대중 강연을 할 때, 혹은 기자나 방송인들과 이야기할 때도 이와 관련된 경험을 자주 한다. 가령 음악인 원종우가 운영하는 팟캐스트에 출연했을 때 인구 표본이 커질수록 남자의 비율이 1/2에 집중되는 현상을 이항분포의 그래프를 가지고 설명하는데 그는 갑자기 “아 저것이 큰 수의 법칙이지요”라고 관찰해서 깜짝 놀랐던 기억이 난다. 최근에는 인터뷰 중에 ‘사칙연산 외에 다른 수학이 왜 필요한가’를 따지던 기자가 나라 사이의 불평등을 논하면서 ‘소득분포의 정량적 비교’ 같은 고등한 개념을 너끈히 소화해냈다. 이런 식으로 대중에게 기초지식의 높은 수준을 기대할 수 있었던 것은 당연히 책을 쓰는 데 많은 도움을 주었다.

또 하나 우리나라 독자들의 특징은 철학적인 명상을 비교적 좋아한다는 것이다. 어떤 종류의 수학적 구조를 논할 때 그것의 실용성도 중시하지만 그 구조가 가진 철학적 의미에도 관심이 많다는 이야기다. 때로는 이런 성향이 이해를 저해하기도 한다. 글 중에 나타나는 장황한 철학은 의미의 모호성을 숨기는 데도 사용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런 스타일을 받아들이는 독자는 명료하게 이해할 기회를 놓치기도 한다. 그러나 의미를 탐구하는 근본주의적인 성향은 긴 안목으로 사물의 깊이에 대한 직관을 키워주기도 하기 때문에 모호성의 약점이 깊은 사유의 강점으로 바뀔 수도 있다. 어쨌든 한국 독자들은 나의 애매한 철학적 습관을 관대하게 받아들일 것이라고 기대하고 글을 쓴 것이 사실이다. 그런 내용을 영어로 옮겼을 때는 단순한 횡설수설로 보이기도 해서 당황했다.

대중을 위한 책이 아니라 연구논문을 읽을 때도 문화적 요소가 작용한다. 새로운 수학 논문을 학술 저널에 게재할 만한지 편집인이 결정하려면 논리의 옳고 그름도 중요하지만 가장 중요한 척도는 논문이 다루는 내용의 흥미도이다. 아무리 정확한 내용을 기술하더라도 논문이 ‘재미없다’는 판결을 받으면 게재될 가망이 없다. 여기서 사용되는 주관적인 판단에는 문화 차이도 당연히 나타난다.

수학은 국제 교류가 굉장히 많은 학문이다. 세계 수학공동체는 지식과 자원을 경계를 초월해서 공유해야 한다는 믿음이 강하다. 그럼에도 각종 지역적인 특징들이 가끔 거론되면서 수학의 인문적인 면을 반영하기도 한다. 가령 프랑스 수학은 추상적인 구조를 선호하고, 영국 수학은 구체적인 예시를 좋아하며, 러시아 수학자들은 기이한 상상력을 잘 발휘한다는 것이 많은 수학자들의 선입관이다. 이런 이야기를 읽는 독자는 자연히 우리나라 수학의 특징을 알고 싶어 할 것이다. 나는 불행히도 그런 지역성을 간파할 객관적인 눈을 갖지 못했다. 그래도 지금은 세계 곳곳에서 많은 한국 젊은이들이 훌륭한 연구를 하고 있으니 외국인의 눈에는 분명히 ‘한국적인 수학’의 면모가 보일 것이다. 거기에는 사회의 전통에 기반을 둔 문화적 성향도 나타날 것이고 구체적인 교육 시스템도 한몫할 것이다.

우리나라의 가혹한 입시제도를 걱정하는 사람들은 당연히 수학교육에 비판의 눈길을 돌리기를 잘한다. 물론 바뀌어야 할 점이 있는 가운데서도 일반인이나 젊은 수학자들의 정량적인 문해력이 표현하는 한국 수학 문화의 특징이 보존되기를 바란다.

김민형ㅣ워릭대 수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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