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주현
정치부장
중학생 무렵이었다. 당시 합기도 도장에 다니셨던 중년의 아버지는 술 한잔하고 집에 오시는 날엔 으레 딸 셋을 불러모았다. 이른바 호신술을 가르쳐주겠다는 것이었는데, 아버지가 일러주는 비법은 이러했다.
‘길거리에서 ‘괴한’이 팔을 붙잡으며 달려들면, 안 끌려가려고 버티지 마라, 힘을 빼고 상대방 쪽으로 무게를 실어라. 그러면 괴한은 잡아당기던 제힘에 끌려 넘어진다. 밀면 당기고 당기면 밀어라.’
아버지와 딸은 괴한과 피해자의 역할을 뒤바꿔가며 몇차례씩 연습하곤 했다. 다행히도 아직 그런 종류의 불미스러운 일을 당한 적은 없지만 때때로 아버지가 가르쳐준 호신술이 생각났다. 힘이 세다고 해서, 힘을 준다고 해서, 반드시 이기는 게 아니다. 힘을 빼라.
며칠 전 만난 여권의 한 핵심 인사도 비슷한 말을 했다. 마침 이때는 윤석열 검찰총장이 정직 2개월의 징계에 불복해 소송으로 맞서자 더불어민주당 의원들이 윤 총장에게 십자포화를 퍼붓던 와중이었다. “본인이 사랑하는 검찰조직을 위해 결단해야 한다” “윤 총장은 결국 자멸할 것이다” 등 민주당 의원들의 날 선 발언엔 그간 윤 총장에 대해 켜켜이 쌓아왔던 감정이 끈적하게 묻어났다.
그는 최근 상황을 이렇게 논평했다. “추미애-윤석열 갈등을 보면 줄다리기가 생각난다. 양쪽 모두 줄이 끊어져라 당기는데 승부가 안 난다. 싸움이 험악해질수록 윤 총장 근수만 올라가고, 피해자 프레임만 굳어지지 않나. 이제 민주당은 더이상 윤석열 이름 석자 입에 올릴 필요가 없다. 지금은 민주당이 당기던 줄을 확 놓을 때다. 그러면 잔뜩 힘주던 상대방은 어이쿠 하며 주저앉을 것이다.”
여당은 지금까지 윤 총장에게 민감하게 반응해왔다. 당 지도부는 직간접으로 추미애 법무부 장관의 ‘과한 태도’에 우려하는 시그널을 보냈다고 하나 먹히지 않았고, 일부 의원들은 ‘검찰개혁’이라는 깃발을 휘날리며 추 장관을 엄호했다. 이후 추 장관은 브레이크 따윈 알지도 못한다는 듯 내달렸고, 윤 총장 징계 청구와 직무집행 정지를 신속히 그리고 독자적으로 결정했다. 대통령은 추 장관이 징계 청구를 발표하기 직전 보고받았다는 게 청와대 설명인데, 이는 대통령이 사전에 인지했다는 설명인 동시에 사전에 상의가 없었다는 말이기도 하다(후자에 방점을 찍는 게 중론이다). 그래서 결과는? 아시다시피다. 직무배제에 대한 법원의 집행정지 인용, 법무부 감찰위원회 권고로 초반 승기를 잡은 윤 총장은 정직 2개월이란 애매한 징계를 받곤, 대통령인지 법무부 장관인지 본인도 헷갈리는 과녁을 향해 불복의 화살을 날렸다. 현재로선 그의 직진 본능을 제어할 수 있는 건 22일 징계집행정지 심문을 진행하는 재판부밖에 없다.
새해엔 고위공직자범죄수사처(공수처)가 출범한다. 여야 모두 공수처의 수사 대상 ‘1호 사건’을 놓고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다. 현재 민주당 일각에선 월성원전 1호기 폐쇄 관련 수사도 다시 공수처에서 맡아야 한다는 얘기가 흘러나온다. 정부의 정책까지 칼질하려는 검찰의 무도함을 내버려둬선 안 된다는 논리다. 윤 총장 일가의 비리 의혹도 공수처가 다뤄야 한다는 말도 있다. 유난히 제 식구에 무른 검찰의 칼날을 모른 체해선 안 된다는 주장이다. 그러나 만약 공수처가 월성원전 수사나 윤 총장 일가 사건부터 손을 댄다면, 다시 그 지긋지긋한 줄다리기가 시작된다. 검찰권력의 견제라는 명분은 현 정권과 윤 총장의 막장극으로 쪼그라들고 개혁의 대의는 빛이 바랜다.
사람들은 추-윤 갈등에 극심한 피로감을 느낀다. 최근 몇달 사이 두 사람의 갈등이 격화될 동안에도 <한겨레> 뉴스로 유입되는 구글 검색 열쇳말 중 ‘추-윤 갈등’이 상위 순번에 오른 적은 거의 없었다. 뉴스 진열대에 잔뜩 올라 있는 ‘추-윤’ 기사는 보지만, 이를 적극적으로 검색해서 보는 ‘보통 사람들’은 많지 않다는 얘기다. 검찰개혁의 당위성은 추-윤 싸움이 아니라 검찰의 ‘96만2천원 술값 계산식’ 같은 문제에서 직관적으로 드러난다. 알 만한 사람은 다 안다. 이제 ‘윤석열 다음’으로 국면을 넘기자. 민주당 먼저 어깨에 잔뜩 들어간 힘을 빼야 할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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