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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조해진의 세계+] 우리의 기본값이 바뀌어야 할 때

등록 2020-12-27 15:35수정 2020-12-28 02:39

조해진ㅣ소설가

코로나19의 확진자 수가 요즘처럼 위협적이지 않을 땐 동네 커피숍 세 군데를 번갈아 다니며 작업을 하곤 했다. 사회적 거리두기가 강화되면서 통 가보지 못하다가, 며칠 전부터는 그 커피숍들이 이 시기를 잘 버텨내주길 바라는 마음에서 의무적으로라도 들러 테이크아웃커피를 한 잔씩 사고 있다. 그중 한 곳은 젊은 할머니가 운영하는 중인데, 어느날 커피를 주문한 뒤 사정이 어떠냐고 슬쩍 물으니 장사를 한 지 2년이 돼 가는데 빚이 수천만원 생겼다는 답이 돌아왔다. 더 절망적인 건 앞으로도 빚이 늘 거라는 분명한 예감이라고, 그럼에도 당장 장사를 접지 못하는 건 2년 전 커피숍을 열면서 인테리어에 들인 정성과 비용 때문이라고 그녀는 말했다. 도무지 제 손으로는 부술 수 없는, 고작 2년밖에 되지 않은 한 사람의 작은 왕국….

사실 임대인이 임차인에게 계약서에 적힌 임대료를 요구하는 것은 상식이자 합법이며 임차인이 그 계약을 이행하지 않는 것이 오히려 비상식이자 불법이다. 적어도 우리가 코로나19를 겪지 않았을 때는 그랬다. 하지만 지금은 일종의 비상시이다. 손해를 피하고 이익을 추구하며 자기 것을 지키는 삶의 기본값이 이제는 다른 사람을 죽게 하거나 죽음을 생각하게 하는 절망으로 작용할 수 있는 비상시…. 집합금지 기간에 임대료를 받지 않거나 삭감해주는 ‘임대료 멈춤법’이 발의되었다는 기사에는 국가가 개인의 사유재산을 침해할 수 없다는 댓글이 많이 달려 있다. 물론 임대인에게 무조건 양보하라고 요구하는 것에는 한계가 있다. 임대료를 깎아주거나 감면하는 임대인에게는 또 다른 혜택이 돌아가야 할 것이다. 다만 손해를 피하고 이익을 추구하는 그 기본값이 공존이라는 이름으로 수정되고 전환된다면 서로의 양보가 조금은 쉽게 합의될 수 있을 것이고, 나는 그 과정을 희망이라 부르고 싶다.

외국계 회사의 파트타임 직원 ‘혜미’의 해고를 둘러싼 작은 소동을 그린 ‘알바생 자르기’(장강명, <산 자들>)라는 단편소설이 있다. 이 소설은 혜미가 아니라 혜미를 어떻게 운용하다가 해고할지 머리를 쓰는 사장과 팀장 입장에서 진행되기 때문에 독자는 그들이 바라보고 판단하는 대로 혜미를 융통성 없고 불성실한 인물로 각인하며 못마땅하게 여기기 쉬운데, 소설이 끝나고 텍스트에서 빠져나오면 그제야 자기 이익을 위해서 다른 이의 먹고사는 문제를 쉽게 생각하는 편에 섰던 스스로에게 놀라게 된다. 어쩌면 지금 우리의 상황이 이 소설의 변형판인지도 모르겠다. 임대료를 내지 못해 쩔쩔매는 그 수많은 소상공인에게 이전의 상식과 기본값을 들이미는 것은 결국 그들의 고통을 모르거나 모른 척하는 비정한 무지일 것이다.

요즘엔 거의 하루 종일 집에 있다가 주로 밤 시간에 마스크를 쓰고 산책을 나가곤 한다. 내가 사는 동네는 오래된 주택가인 동시에 전통시장 바로 옆에 위치해 있어서 고요함과 소란함이 공존하는 곳이다. 그런데 사회적 거리두기가 상향된 이후엔 밤 9시만 돼도 거리뿐 아니라 시장도 고요해지고, 간혹 문을 연 상점은 대개 텅 비어 있는 걸 목격하게 된다. 밤 산책을 하며 코맥 매카시의 소설 <로드>를 남몰래 떠올리곤 한다. <로드>는 법과 정의, 그리고 신도 사라진 종말 이후의 세상에서 주인공이 어린 아들을 지키기 위해 끊임없이 길을 걷는 내용을 담고 있다. 코로나19로 아르바이트를 구하지 못한 청년들과 무료급식소를 이용해오던 저소득층 노인들이 굶고 있다는 기사를 아픔 없이 접하는 것, 나도 힘들다는 이유로 외면하거나 못 본 척하는 것, 그래서 결국 아무런 변화 없이 살던 대로 살아가는 것, 그런 무감함이 보편적인 정서가 될 때 <로드>가 그리는 지옥도는 상징적인 의미에서 우리의 현실이 되어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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