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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민주노총 바라보는 시민사회 눈빛이 더 힘들다”

등록 2020-12-28 15:58수정 2020-12-29 02:39

박찬수의 ‘진보를 찾아서’ _13
1998년 2월24일 낮 서울 여의도 국민회의 당사에서 농성을 벌이던 한 노동자가 당사 밖에서 정리해고 도입에 반대하는 민주노총 집회가 열리자 함께 구호를 외치고 있다. 그해 2월6일 노사정 3자는 정리해고 도입과 노조 정치활동 등을 담은 ‘사회협약’을 체결했으나, 민주노총 대의원대회는 이 협약을 부결시키고 대정부 투쟁에 나섰다. 정리해고 도입은 진보정권과 노동계 갈등의 출발점이 됐다. 김봉규 기자
1998년 2월24일 낮 서울 여의도 국민회의 당사에서 농성을 벌이던 한 노동자가 당사 밖에서 정리해고 도입에 반대하는 민주노총 집회가 열리자 함께 구호를 외치고 있다. 그해 2월6일 노사정 3자는 정리해고 도입과 노조 정치활동 등을 담은 ‘사회협약’을 체결했으나, 민주노총 대의원대회는 이 협약을 부결시키고 대정부 투쟁에 나섰다. 정리해고 도입은 진보정권과 노동계 갈등의 출발점이 됐다. 김봉규 기자

민주노총의 새 집행부가 문재인 정부와 대면할 시간은 1년4개월여밖엔 남지 않았다. 갈등과 대립의 시간이 흐른 뒤 “진보정권도 보수정권과 다를 게 없다”고 말하는 건 쉽다. 정말 어려운 건, 노동과 사회 현안에서 작지만 의미 있는 변화를 이뤄내는 것이다. 그건 사회적 대화 외엔 달리 방법이 없다. 오랫동안 민주노총의 구호는 ‘세상을 바꾸자’였다. 변화의 물꼬를 민주노총을 비롯한 노동 쪽이 먼저 여는 게 진정 세상을 바꾸는 행동은 아닐까.

노동계에 진보정권은 믿을 수 있는 친구인가, 아니면 정권의 이해를 최우선으로 하는 5년마다 바뀌는 권력의 하나일 뿐인가. 우문처럼 보이는 이 질문엔 노동운동이 바라보는 진보정권의 상이 담겨 있다.

“어차피 정권은 5년 유한하지만 노조는 지속돼야 한다, 그러니까 (정부에) 가까이 가면 안 된다는 생각을 갖는다. (진보정권이라도 정권과 가까워지면) 조직의 개량화, 체제내화가 급속히 진행될 것이라는 우려가 있다. 그런 연장선에서 사회적 대화, 사회적 교섭주의와 싸워야 한다는 주장이 나온다. 여기에 ‘저항’이란 화두에서 모든 걸 배치해온 오랜 역사적 경험이 쌓이다 보니 (진보정권이 만든 공간을) 최대한 활용하자는 실용적 접근을 하기가 쉽지 않다.” 지난 7월 ‘코로나19 극복을 위한 원포인트 노사정 합의’를 추진했던 김명환 전 민주노총 위원장은 진보정권을 바라보는 노동 쪽의 시각을 이렇게 설명했다. 코로나 사회협약은 김명환 전 위원장의 제안으로 시작됐지만, 합의문까지 작성하고도 민주노총 대의원대회의 벽을 끝내 넘지 못했다.

민주노총의 한 간부급 인사는 “진보정권도 1~2년 지나면 결국 자본의 요구에 굴복하는 모습을 보이고, 이런 경험이 노동계와 진보정권이 협력할 수 있는 토대를 허물었다”고 말했다. “김대중 정부와 노무현 정부, 또 문재인 정부도 마찬가지인데, 예외 없이 (집권) 1~2년을 지난 시점에서 보면 노동정책이나 법·제도 개선 문제가 거의 다 후퇴한다. 처음엔 노동친화적 정책과 제도를 내세웠다가도 정권 중반기부터 후퇴하니까, 충돌과 갈등이 일어날 수밖에 없다. 문재인 정부의 ‘노동존중’에 대한 기대는 아주 높았다. 조합원 설문조사를 하면, 역대 정권 중 가장 노동계와 호흡할 수 있는 정권이란 평가를 받았다. 그런데 1년 정도 지나면서 (노동존중은) 통과의례 이상의 의미를 갖지 못했다.”

‘정권은 유한하지만 노조 운동은 계속돼야 한다’는 말은 틀리지 않다. 정치권력은 언제든지 진보에서 보수로 바뀔 수 있다. 정권의 부침에 상관없이 운동이 명분과 정당성을 가져야 한다는 생각은 노동운동뿐 아니라 다른 시민·사회운동에서도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다. 그러나 이런 경향이 노동조합 운동의 순수성을 강조하는 ‘순혈주의’로 흐르는 순간, 진보정권과 보수정권의 차이를 너무 협소하게 여기는 쪽으로 빠지기 쉽다. 이명박·박근혜 정부 시절 노동계는 대화와 타협의 길이 막혀 투쟁 외엔 다른 길을 찾기 힘들었다. 그에 비하면 문재인 정부에선 좀 더 다양한 가능성이 열려 있는 게 사실이다. 그럼에도 10개의 요구사항 중 핵심적인 2~3개가 충족되지 않으면 다른 6~7개를 얻는 건 무의미하다는 ‘순혈주의’는 여전히 강하게 작동하고 있다. 그렇게 5년이 흘렀을 때, 보수정권 5년이나 진보정권 5년의 차이는 없게 된다. 결국 “진보정권(자유주의 정권)이나 보수정권이나 다르지 않다”는 비판이 노동계에선 나온다.

그러나 진보정권의 책임 못지않게, 노동계 역시 운동의 기반 확대와 사회 전체의 이익을 위해 해야 할 일을 하지 못하고 시간을 흘려보냈다는 비판에서 자유로울 수는 없다. 이남신 서울노동권익센터 소장은 “진보정권 집권 기간엔 노-정 사이에 긴장이 있더라도 서로 협력할 건 협력하면서 파트너로서 일정 부분 진전을 이뤄내는 게 필요하다. 핵심 현안에서 타협이 이뤄지지 않았다고 해서 다른 사안까지 사회적 대화와 타협을 거부해서는 노조의 정치·사회적 영향력이 커질 수가 없다”고 말했다.

정말 아픈 부분은 정부와의 관계가 아니다. 진보정권과의 대립은, 비록 얻는 게 없어도 ‘원칙과 명분’을 내세울 수 있는 여지라도 있다. 하지만 사회적 대화와 타협에 소극적인 모습은 한국 사회에서 노동운동이 차지해온 영향력의 감소와 함께, 노조의 고립으로 나타난다. 1995년 세상에 첫발을 내디딘 민주노총이 영향력을 확장할 수 있었던 이유는, 초기에 국민연금 개혁이나 사회안전망 확대 같은 정치·사회 현안에 목소리를 내며 시민사회 진영의 폭넓은 지지를 이끌어냈기 때문이다.

지금도 민주노총은 다른 부문과의 연대에 적극적이다. 그러나 민주노총을 바라보는 눈길은 예전과 같지 않다. 김명환 전 위원장은 그게 더 힘들다고 말했다. “올해 ‘코로나19 극복을 위한 사회적 대화’를 추진하면서 보니까, 시민사회 인사들이 ‘정규직 해고를 막기 위해 그러는 거 아니냐’는 눈빛을 보내더라. 다른 부문과의 연대나 결합도가 (예전에 비해) 확 떨어졌다는 걸 피부로 느꼈다. 한국 사회와 공동체의 문제를 해결하는 파트너로서 민주노총을 바라보고, 진지한 토론과 협력의 대상으로 여기는 인식이 점점 사라지고 있다.” ‘대기업과 공공부문 정규직만을 위한 조직이 아니냐’는 싸늘한 시선, 지금 민주노총이 직면한 가장 큰 위기는 여기에 있다.

그 점에서 민주노총은 우리 사회의 이른바 ‘586세대’와 닮은 지점이 있다. 민주노총은 1987년 노동자 대투쟁 이후 어용노조를 극복하고 노동자의 자주권과 단결권을 확대하는 민주노조 운동을 통해 성장했다. 현대자동차 같은 대기업 노조의 임금 인상 또는 노동조건 개선 투쟁은 자본의 횡포를 제어하고 불평등을 완화한다는 점에서 한국 사회 민주화와 궤를 같이했다. 민주화 운동과 민주노조 운동은 동전의 양면과 같았다. 이런 역사적 성과에 대한 자부심은 지금도 나이 든 민주노총 핵심 조직원들의 마음속 깊이 자리잡고 있다. 민주노총을 향한 외부의 시선을 산별노조 간부들도 모르지 않는다. 그러나 과거를 돌아보면 대한민국에서 노동에 우호적인 시기가 어디 있었나, 그걸 뚫고 하는 게 노동운동이라는 생각을 강하게 갖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정부와 타협하지 않아도 노동운동은 계속 갈 수 있고 또 가야 한다는 믿음, 1987년 이후 민주노조 운동을 하면서 거둔 성과에 대한 평가가 그런 인식의 밑바탕에 깔려 있다. 과거의 성과와 자부심이 지금 행동에 정당성을 부여한다는 생각은 우리 사회 586세대가 비판받는 그 지점과 일맥상통한다.

진보정권에 대한 노동계의 불신이 근거 없는 건 아니다. 출발점은 아이엠에프(IMF) 구제금융 사태 직후의 정리해고 시행이었다. 1998년 정리해고 즉각 도입과 노조 정치활동 허용 등을 담은 2·6 사회협약은, 최초의 노사정 대타협이란 평가와 달리 그해 2월24일 민주노총 대의원대회에서 부결됐다. ‘긴박한 경영상의 이유로 해고할 수 있다’는 조항 하나로 수많은 노동자가 거리로 내쫓기고, 때론 목숨을 잃었다. 노동조합 운동의 성격도 바뀌었다. 참여정부에서 청와대 노동비서관을 지낸 권재철씨는 “아이엠에프 시기의 정리해고 허용은 대량 실업으로 이어졌고 이후 (노동조합에서) 비타협적인 운동노선이 뿌리내린 것은 이해할 수 있는 측면이 있다. (정리해고는) 생존의 문제니까, 그럴 수 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민주노총이 (노사정 대타협인) 2·6 사회협약을 승인하고, 고용 안정을 위한 정책과 사회안전망 확대에 매달렸으면 어땠을까 하는 아쉬움이 든다. 지금 돌아보면 그렇게 하는 것이 이후 진보정권 집권 기간에 (노동 문제에서) 좀 더 실질적인 진전을 가져오지 않았을까 생각한다”고 말했다.

오랫동안 민주노총의 구호는 ‘세상을 바꾸자’였다. 그러나 세상을 바꾸자고 외치는 동안, 정작 스스로를 바꾸는 데엔 소홀했다는 지적은 의미심장하다. 민주노총 출신으로 박원순 시장 시절 서울시에서 노동 업무를 기획했던 주진우(현 서울시사회서비스원 대표)씨는 “박원순 시장이 첫 임기를 시작할 때 서울시 본청 공무원 1만1천명 중 노동을 전담하는 담당자가 딱 한명이었다. 그게 점점 커져서 지금은 노동권익센터를 비롯해 다양한 조직이 있다. 분명 (진보정부와 보수정부의) 차이는 있다”고 말했다. 주씨는 “(진보정권 아래서) 노동계가 전국민 고용보험 등을 매개로 사회적 대화에 적극 참여한다면, 그렇게 미조직 노동자들과 자영업자, 소상공인에게까지 도움을 주고 조직화를 한다면, 나중에 훨씬 큰 영향력을 발휘할 수가 있지 않을까 싶다”고 말했다.

최근 민주노총은 새 집행부를 선출했다. 새 집행부가 문재인 정부와 대면할 시간은 1년4개월여밖엔 남지 않았다. 갈등과 대립의 시간이 흐른 뒤 또다시 “진보정권도 다를 게 없다”고 말하는 건 쉽다. 정말 어려운 건, 노동과 사회 현안에서 작지만 의미 있는 변화를 이뤄내는 것이다. 그건 사회적 대화 외엔 달리 방법이 없다. 변화의 물꼬를 민주노총을 비롯한 노동 쪽이 먼저 여는 게 진정 세상을 바꾸는 행동은 아닐까.

박찬수 | 선임논설위원. <한겨레신문>에서 정치부와 사회부·국제부 기자로 일했다. 국회와 청와대를 취재하며 ‘정치란 결국 권력 행사를 통해 사회를 바꾸는 것’이란 생각을 갖게 됐고, 그 점에서 어떻게 하면 권력을 제대로 올바르게 행사할 수 있을까에 관심이 많다. 청와대와 백악관의 작동 방식을 비교한 <청와대 vs 백악관>(2009년)과 1986년 태동한 민족해방(NL) 사조를 다룬 <엔엘(NL) 현대사>(2017년)를 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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