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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크리틱] 더 높은 법 / 정영목

등록 2021-01-01 15:37수정 2021-01-02 02:32

정영목ㅣ번역가·이화여대 통역번역대학원 교수

19세기 미국 내전이 노예 해방을 내걸고 시작된 것이 아니라는 사실은 잘 알려져 있다. 링컨은 노예 해방이라는 면에서는 중도파에 속했고 애초에 공화당 대통령 후보로 나설 수 있었던 것도 경합주에서 반감이 적은 온건한 이미지 때문이었다. 노예제 폐지론자들은 소수 급진파였으며 전쟁이 시작되었을 때는 아마 이들도 노예제가 폐지될 것이라고 기대하지 않았을 것이다. 이때만 해도 노예제는 헌법의 보호를 받고 있었다. 그래도 노예제 폐지를 이런 수준까지 정치적 의제로 밀어올린 중요한 동인은 제2차 대각성 운동이라는 복음주의적 부흥운동의 영향하에 있던 기독교의 외침이었다. 노예제를 둘러싸고 온갖 이해관계가 얽힌 상황에서 그들의 논리는 간단했다. “모든 사람은 하느님의 눈앞에 평등하다. 따라서 헌법이 인정한다 해도 하느님의 자녀가 다른 자녀를 노예로 삼는 것은 ‘더 높은 법’에 어긋난다.” 남부 현실에서는 씨도 안 먹힐 이런 주장을 하는 사람들은 더 높은 법 광신자라고 비난받기도 했다.

한반도에 온 선교사 가운데도 이 부흥운동의 영향을 받은 사람이 많다고 하는데 더 높은 법 정신은 일종의 주인-노예 관계가 형성된 일제강점기에 어떻게 표현되었을까. 대부분의 기독교 조직이 결과적으로 신사참배까지 국가 의식으로 인정하고 받아들인 것을 보면 더 높은 법 정신은 이 땅에 제대로 이식되지 않았던 듯하다. 그러나 이식되지 않았다 뿐이지 자생적인 것도 없었다는 뜻은 아니다. 이만열의 ‘신사참배와 한국교회’를 보면, 일제의 폭정이 절정에 이른 1930년대 말에 모든 교단이 무릎을 꿇은 뒤 신사참배 반대운동은 “일사각오”를 했던 성직자 개인들에게로 넘어간다. 흥미롭게도 중심인물 주기철은 1920년대 토착 부흥운동의 산물이고 그와 더불어 순교자가 된 최봉석은 “예수 천당”을 외치던 인물이었다. 출발점이 무엇이든 이들은 국가 의식에 반대하여 결과적으로 천황제 헌법에 도전하는 길로 나선 것이니 더 높은 법의 정신을 자생적으로 체득하고 체현한 셈이다.

실제로 일제는 신사참배 반대자들을 보안법 위반 등으로 걸고 반국가사범으로 다루면서, 그들이 “궁극적으로 일본 국체를 변혁하여 천년왕국을 건설할 것을 목적으로 (…) 비밀결사를 조직”했다고 규정했다. 오, 일제의 근엄한 법치의 얼굴이여! 아마 천년왕국을 이렇게 진지하게 받아들인 사람은 당시 기독교인 가운데도 그리 많지 않을 것이다. 이런 전통에 선다면 안중근이 범죄자라는 말도 정말로 정색하고 할 수 있고, 또 그런 이들을 범죄자로 사법처리한 사람도 법을 수호했을 뿐이라고 말할 수 있을 듯하다. 실제로 뉘른베르크 전범 재판에서 몇몇 나치 전범의 방어 논리가 바로 당시의 실정법을 따랐을 뿐이라는 것이었다. 물론 그들을 단죄할 때 근거로 삼은 것은 더 높은 법 논리였다.

사실 더 높은 법이라는 표현을 안 쓸 뿐 우리는 경험상 그런 생각에 익숙하다. 심지어 법을 다루는 사람도 국민과 양심을 따른다는 수사를 구사하는 것을 보면 그들이 오히려 실정법 너머를 더 의식하고 있다는 느낌이 든다. 어느 국민과 어떤 양심을 따르겠다는 것인지, 그 문제는 결국 자기들이 알아서 한다는 것인지 늘 모호하긴 하지만. 반대로 보통 사람은 지난 대통령 탄핵 과정에서 더 높은 법과 실정법이 순간적으로 일치하는 경험이 너무 낯설고 상쾌했던 나머지 그것이 더 높은 법의 일부가 자신을 형식적으로 완성한 것일 뿐이라는 사실을 잊어버리고 마치 실정법이 독자적으로 성취를 이루어낸 듯한 착각에 빠지는 듯하다. 더 높은 법이라는 말이 위치만 나타내는 모호한 표현으로 남은 것은 아마도 이럴 때 그게 다가 아니라는 깨우침을 주려는 것인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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