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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크리틱] 눈 오는 지도 / 배정한

등록 2021-01-15 13:57수정 2021-01-16 02:33

도시의 모든 경계가 지워졌다. ©배정한
도시의 모든 경계가 지워졌다. ©배정한

배정한|서울대 조경학과 교수·‘환경과조경’ 편집주간

눈은 시각은 물론 청각과 촉각, 후각과 미각이 뒤섞인 공감각의 프리즘을 통과해 우리 신체에 도착한다. 멀리서 바라보고 가까이서 냄새 맡고 손으로 건드려보고 그 안에서 뒹굴고 그 고요에 귀 기울여보아야 눈의 정체를 가까스로 이해할 수 있다. 눈은 두 얼굴을 가지고 있다. 어떤 곳의 누군가에게는 불편과 위험을 끼치지만, 다른 곳의 많은 이에게는 기쁨과 즐거움을 준다. 우리가 노력하지 않아도 눈은 우리를 비일상의 세계로 순간 이동시켜준다. 얼마나 환상적인가.

환상의 시간은 때로는 사색을 초대한다. 그래서 눈은 시인의 날씨일 것이다. 함박눈 내리는 날이면 그의 간절한 시를 떠올리지 않을 수 없다. “네 쪼그만 발자국을 눈이 자꾸 내려 덮어 따라갈 수도 없다. 눈이 녹으면 남은 발자국 자리마다 꽃이 피리니…”(윤동주, ‘눈 오는 지도’). 그러나 낭만과 담을 쌓고 지내는데다 매사에 허술한 나는, 눈만 만나면 문제에 맞닥뜨려 허둥대곤 한다. 지난주 수요일도 어김없었다.

정말 눈이 많이 온 밤이었다. 거센 한파가 덮친 도시를 위해, 하늘은 굵은 눈발로 소리 없이 새 옷을 지었다. 도시의 모든 경계가 지워졌다. 욕망과 좌절을 가르는 선들이 사라졌다. 소란과 소음이 소거되고 침묵의 소리가 살아났다. 높고 낮음, 깨끗함과 더러움, 아름다움과 추함의 구별이 무너졌다. 하지만 이 경이로운 탈경계의 현장에서 나는 그만 고립되고 말았다.

빈틈없는 커튼 덕분에 네시간째 폭설이 내리고 있다는 걸 뒤늦게 깨달았다. 한두줄 더 끄적거리겠다는 미련에 그 뒤로도 한시간을 더 지체했다. 학교 밖 급경사 언덕에 자동차들이 뒤엉켜 교문조차 빠져나갈 수 없었다. 간신히 차를 돌려 연구실로 퇴각하는 데 두시간이 흘렀다. 눈 덮인 산을 넘어봐야 이미 지하철이 없는 시간이었다. 숨을 고르고 생수와 초콜릿을 챙겨 다시 운전을 감행했지만 언덕 상황은 전혀 나아지지 않았다. 되돌아와 자발적 고립을 택할 수밖에 없었다. 이 김에 1년치 칼럼을 미리 다 써버리자 마음먹으며.

소란과 소음이 소거되고 침묵의 소리가 살아났다. ©배정한
소란과 소음이 소거되고 침묵의 소리가 살아났다. ©배정한

차가운 테이블에 몸을 눕혀 뒤척이다 보니 잊고 지낸 기억이 하나둘 떠올랐다. 2010년이었던가. 새해 첫 출근길, 판교나들목부터 양재나들목까지 세시간, 말죽거리에서 예술의전당까지 두시간 곡예를 펼치다 결국 차를 길가에 버리고 탈출했다. 느낌으로는 허벅지까지 눈에 빠졌던 그날, 반나절 만에 서울의 적설량은 25.8㎝를 기록했다. 1937년 관측 이래 최대였다. 2004년 봄의 난데없는 폭설은 경부고속도로를 사흘간 마비시켰다. 3월4일부터 6일까지 계속 내린 눈으로 2만여명이 탄 1만대 가까운 차량이 고속도로에 갇혔다. 가장 오래 고립된 경우는 37시간이었다. 내가 빠져나오는 데는 다섯시간이 채 걸리지 않았지만, 헬기에서 눈밭으로 낙하된 빵과 우유의 맛은 아직도 생생하다.

극한 상황에서도 늦잠 버릇은 여전했다. 출근 소리에 복도가 들썩이기 시작한 뒤에야 연구실을 빠져나왔다. 경계가 삭제된 도시에는, 시인의 말처럼 ‘눈 오는 지도’가 아득히 깔려 있었다. ‘겨울왕국’으로 변한 아파트 단지는 눈싸움하는 아이들로, 눈사람 만드는 아이들로 모처럼 북적였다. 코로나바이러스에 움츠러든 아이들이 모두 뛰쳐나왔기 때문일까. 눈사람을 이렇게 많이 본 건 처음이다. 예전과 달리 눈강아지와 눈고양이도 있었다. 눈오리들이 특별히 눈에 띄었는데, 방탄소년단이 만들어 트위터에 올린 사진 영향으로 전국 곳곳에서 눈오리가 태어났다고 한다. 눈사람 구경을 하며 한참 걷다 보니 비릿한 눈 냄새가 올라왔다. 얼마 만에 맡아본 도시의 눈 냄새인가. 자발적 고립의 피로감이 녹아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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