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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백기철 칼럼] ‘단죄의 시간’ 그 이후

등록 2021-01-20 17:37수정 2021-01-21 02:45

기계적인 사면과 용서에 대한 국민적 반감은 국민들이 여전히 공정에 목말라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진정한 통합은 공정이라는 고통스러운 터널을 거치고서야 가능할지 모른다. 통합을 위한 통합, 통과의례식 통합이 아니라 공정을 기반으로 한 통합이 시대정신에 가깝다. 또한 진정 어린 통합 역시 공정으로 가는 길을 당길 수 있다.
박근혜 전 대통령이 2017년 5월 서울중앙지법 법정에서 재판 시작을 기다리고 있다(왼쪽). 이명박 전 대통령이 2020년 2월 서울고법에서 열린 선고 공판에 출석하러 법정으로 향하고 있다(오른쪽). 사진공동취재단, 김정효 <한겨레> 기자
박근혜 전 대통령이 2017년 5월 서울중앙지법 법정에서 재판 시작을 기다리고 있다(왼쪽). 이명박 전 대통령이 2020년 2월 서울고법에서 열린 선고 공판에 출석하러 법정으로 향하고 있다(오른쪽). 사진공동취재단, 김정효 <한겨레> 기자

박근혜 전 대통령과 이재용 삼성 부회장의 국정농단 재판이 일단락되면서 우리 사회는 일종의 전환점을 지나고 있다. 문재인 대통령이 두 전직 대통령 사면에 대해 선을 그은 것까지 더해 이른바 ‘죄와 벌’의 문제가 어느 정도 마무리됐다. 지금은 ‘단죄의 시간’ 이후를 생각할 때다.

적폐청산, 질풍노도의 시기를 뒤로하고 앞으로 다가올 시대의 화두는 무엇일까? 개인적으로 공정과 통합이라 생각한다.

2016년 촛불 이후 지난 4년여를 지배한 화두는 공정이었다. 격차 해소, 갑질 근절, 공정경제 확립 등은 크게 보면 ‘공정의 시대’로 가자는 요구였다. 4년을 결산해보면 ‘단죄를 통한 공정’은 어느 정도 실현됐지만 거꾸로 ‘진정한 공정이란 무엇인가’라는 의문이 제기됐다. 지금까지가 미완의 공정이었다면 이젠 성숙한 공정, 진일보한 공정으로 가야 한다.

미국 정치철학자 마이클 샌델은 최신작 <공정하다는 착각>에서 능력주의가 공정의 최대 적이라고 단언한다. 학벌과 지위가 온전히 자기 능력 때문이라 믿고서 모든 걸 가질 자격이 있다고 생각하는 능력주의야말로 가진 이들의 탐욕과 오만을 부추기고, 못 가진 이들의 좌절과 분노를 키웠다고 했다.

샌델의 주장은 쉽게 말해 “하면 된다” “교육이 기회의 창이다” 등의 말로 대중을 현혹하지만 실제로는 교육, 일자리, 소득 등은 대물림되고 있다는 것이다. 대학에 못 간 이, 하위 대학에 진학한 이, 굴뚝산업에서 일하는 이들의 상대적 불운을 능력 부족 탓으로 돌리면서 이들을 패배자, 낙오자로 몰아갔다는 것이다.

샌델은 특히 미국의 빌 클린턴, 영국의 토니 블레어, 독일의 게르하르트 슈뢰더로 대표되는 서구의 중도좌파 정당들이 능력주의와 결합된 공정론 탓에 지난 40년에 걸친 불평등 확대를 저지하지 못하고 오히려 합리화했다고 했다.

우리 현실은 어떤가. 결국 문재인 정부도 클린턴·오바마, 블레어 등으로 대표되는 이른바 ‘능력주의 공정’의 전철을 밟은 것 아닌가. 서구의 중도좌파 정당과 비교할 건 아니지만 큰 틀에서 시장을 적당히 제어하고 복지를 다소 확대하는 선에서 격차를 줄이려는 정책적 시도가 결국 이들과 비슷한 한계에 봉착한 것 아닌가.

문재인 정부의 4년은 공정, 격차 해소를 위한 여정이었지만 그 노력이 크게 성공적이었다고 보기 어렵다. 소득 격차는 재정 탓에 조금 진정세를 보일 뿐 여전히 심각하고 자산 격차는 더 심해졌다. 코로나로 인한 비대칭적 격차는 그 파장을 가늠하기조차 어렵다.

문재인 정부의 공정이 엘리트, 전문가, 기술관료 등 이른바 ‘기득권 좌파’의 이해관계를 반영하는 것 아니냐는 의심에서도 자유로울 수 없다. 조국 사태는 우리 사회에도 능력주의로 포장된 불공정, 학벌의 대물림을 위한 변칙들, 기득권을 지키려는 상호부조 등이 횡행하고 있다는 걸 어렴풋이 보여줬다.

공정의 질적 심화를 위해서는 학벌 타파, 공동체적 연대, 노동의 존엄성 확립 등이 언급된다. 샌델은 대학 입학 추첨제, 국가의 노동자 임금 보전 확대, 소비세·부유세·금융거래세 대폭 확충, 연대와 존중의 대안적 정치 프로젝트 등을 제시했다. 우리의 경우 코로나를 전후해 제기된 기본소득, 사회연대세 등을 논의해볼 수 있을 것이다.

통합 역시 시대의 화두임은 분명하다. 한국 정치의 가장 큰 악습은 분열과 증오의 정치를 되풀이하는 것이다. 청산과 단죄의 시간이 있었다면 용서와 화해의 시간도 필요하다.

하지만 단죄가 끝났으니 이제는 통합의 시간이라고 말하기 쉽지 않다. 이명박·박근혜 사면론에 대한 싸늘한 국민 정서를 보면 그렇다. 법원이 어떻게든 이재용 부회장을 선처하려 했던 것 같지만 공정과 정의에 대한 사회의 엄정한 분위기가 이를 용납하지 않았다.

기계적인 사면과 용서에 대한 국민적 반감은 국민들이 여전히 공정에 목말라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결국 진정한 통합은 공정이라는 고통스러운 터널을 거치고서야 가능할지 모른다. 통합을 위한 통합, 통과의례식 통합이 아니라 공정을 기반으로 한 통합이 시대정신에 가깝다. 물론 진정 어린 통합은 공정으로 가는 길을 당길 수 있다.

여당의 차기 주자를 거칠게 공정과 통합으로 나눈다면 공정을 앞세운 쪽이 조금 앞서는 것도 이런 이유일 것이다. 또 국민의힘이 반사이익을 얻고 있지만 크게 힘을 받지 못하는 이유 역시 시대의 화두인 공정과 통합에 대해 분명히 말하는 이가 없기 때문이다. 국민은 여전히 제대로 된 공정과 이를 통한 견실한 통합을 원한다.

백기철ㅣ편집인 kcbaek@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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