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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조해진의 세계+] 임시 지구 거주인의 임무

등록 2021-01-24 18:05수정 2021-01-25 02:39

조해진 ㅣ 소설가

2020년은 우리가 이전까지 살아오면서 거의 입에 담아본 적 없는 단어들이 일상의 언어가 된 해였다. 팬데믹, 셧다운과 록다운, 언택트, 자가격리, 항체와 백신 같은 단어들 말이다. 그 단어들이 무시로 사용되는 풍경 속에는 마스크에 가려진 무표정한 얼굴의 사람들과 텅 빈 공항과 극장, ‘점포 정리’나 ‘임대 문의’가 내걸린 상점들이 있었다. 어느 날인가는 영안실이 가득 차서 냉동 트럭에 시신을 보관하는 미국과 유럽의 몇몇 도시를 뉴스로 확인하며 서늘한 위기감을 느끼기도 했다.

스티븐 소더버그 감독의 <컨테이젼>(2011)은 10년 전에 제작됐다는 것이 믿기지 않을 만큼 지금의 현실과 흡사하다. 바이러스 감염을 두려워하는 사람들의 위축된 모습, 병원과 의료진이 감당하지 못할 만큼 넘쳐나는 사망자들, 치료제가 없는 상황에서 효과가 있다고 소문난 특정 식품을 향한 맹목적 믿음 등이 그러하다. 그 와중에 변이 바이러스가 발견된다든지 어렵게 개발된 백신이 충분히 공급되지 못해서 갈등을 유발한다는 영화 내용도 현재 그대로 재현되고 있다. 영화가 현실을 앞서간 설정은 정치인들과 세계보건기구가 보여준 발 빠른 대처, 그리고 영화 속 바이러스가 전염성과 치명률이 모두 높은 슈퍼바이러스라는 점 정도이다. 코로나19만큼 전파력이 강하면서도 전세대에 걸쳐 치명률까지 높은 슈퍼바이러스의 출현은 상상만으로도 끔찍하지만 합리적인 예측이기도 하다.

<컨테이젼>의 엔딩신은 의미심장하다. 인간의 벌목으로 거처를 잃은 박쥐가 인가로 와서 배설을 하고 그 배설물을 먹은 돼지가 다시 인간에게 도축되는 과정이 짧은 영상으로 펼쳐지는데, 당연히 환경 파괴와 바이러스의 연관성을 암시한다. 물론 영화 밖에서도 코로나19를 비롯한 각종 바이러스가 환경 파괴랄지 기후위기와 관련이 있다는 것은 이제 정설이 되어가고 있다.

2020년을 지나 2021년을 맞으며 나는, 최은영 소설집의 제목인 <내게 무해한 사람>을 빌려 ‘지구에 (최대한) 무해한 사람’이 되자는 새로운 모토를 갖게 됐다. 구체적인 실천 방식이라면 쓰레기를 줄인다든지 육식을 최소화하는 상식적인 범주에 아직은 국한되어 있지만, 앞으로 살아가면서 내 나름의 방식들도 찾아가려 한다. 아니, 찾아가고 있다.

최근에 큰 눈이 내린 날이 몇번 있었다. 눈이나 비가 내리면 지구의 모든 물질은 순환한다는 자연의 원리가 새삼 상기되곤 한다. 내 성분의 무언가도 기화되어 구름이 되었다가 눈이나 비로 내린다고 생각하면 나는 이 지구의 임시 거주인일 뿐이라는 사실이 분명하게 체감되기도 한다. 내린 눈으로 도로 상황이 좋지 않던 어느 날, 지하철을 타러 역사 안으로 들어서는데 빵 냄새가 기분 좋게 맡아졌다. 잠시 멈춰 서서 빵집 쪽을 바라보았다. 오븐을 살피고 빵을 나르는 직원을 보니 조우리의 단편소설 ‘11번 출구’(소설집 <내 여자친구와 여자 친구들>)가 떠올랐다. 지하철역 빵집에서 커피와 빵을 파는 소설 속 주인공 ‘다미’가, 첫차와 막차로 출근과 퇴근을 하고 차가운 도시락으로 점심과 저녁을 해결하고 일하는 동안 휴가 한번 가본 적 없는 그녀의 고단한 삶이…. 풍경 속에서 타인의 삶을 상상하는 건 소설을 읽고 쓰는 사람으로서 갖게 된 습관 중 하나이다. 독자로서 내가 그랬듯 다른 사람들도 내 문장을 읽으며 타인과 세계에 조금이나마 더 애틋해질 수 있도록 애쓰는 것, 그래서 누군가는 이 행성에 잠시 머물다 가는 그 유한성을 새삼 환기하며 모든 생명과 자연에 무해하자는 태도를 갖게 되기를 바라는 것, 그것이 내게 주어진 임시 지구 거주인의 임무 중 하나라는 것을 그제야 나는 깨달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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