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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편집국에서] 남보다 못한 가족, 불멸의 신성가족 / 석진환

등록 2021-02-10 17:04수정 2021-02-11 14:08

석진환 | 이슈 부국장·사회부장

법관 탄핵과 대법원장 거짓말 논란 등으로 법원이 또 한 차례 격랑을 겪고 있다. 사태의 두 주인공인 임성근 부장판사와 김명수 대법원장의 행적을 곱씹다 보니, 위기의 원인이 실은 ‘가족주의’가 아닐까 생각했다. 법원장들이 취임·퇴임사 때 후렴구처럼 “법원 가족 여러분”이라고 부를 때의 바로 그 가족 말이다.

동료를 가족이라 부를 때 느껴지는 정겨움과 따뜻함이 어떤 상황에선 괴물이 되는 걸 우리는 너무 많이 봐왔다. 실수를 덮어주거나, 잘못을 숨겨주거나, 무언가 부당한 부탁을 하거나, 남몰래 밀어주고 끌어줄 때 가족주의는 괴력을 발휘한다.

김 대법원장이 재판개입이라는 위헌적 행위를 한 임 부장판사를 봐주려고 했던 게 문제의 시작이다. 그에게 내려진 견책이라는 징계가 이를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가장 가벼운 징계를 받은 임 부장판사는 ‘분가’해 개업하겠다는 걸 막는 대법원장이 이해되지 않았을 것이다.

대법원장은 그를 설득했다. 총선에서 민주당이 압승한 직후였다. 설득 취지를 요약하면 이렇다. ‘탄핵은 안 될 거야. 나도 바라지 않고. 근데 지금 나가면 ‘사법개혁’ ‘판사탄핵’ 어깨띠 두르고 갓 국회의원 배지 단 이탄희 등이 방방 뜰 건데, 그러면 너나 나나 다 욕먹잖아. 1심 무죄도 받았으니 내년 2월 임기 끝나면 자연스럽게 나가는 거로 하자. 오케이?’

임 부장판사도 당시엔 어쩔 수 없었을 것이다. 몰래 한 녹음도 그땐 공개하지 않았다. 어쩌면 정치권의 공격을 피하려는 대법원장 처지를 이해했을 수도 있다. 공교롭게도 그 역시 대법원장과 비슷한 취지의 말을 한 적이 있다. 2019년 12월20일, 재판개입 혐의로 기소돼 법정에 선 그는 1심 재판 최후진술에서 이렇게 항변했다.

“형사수석부장으로서 저의 주된 임무는 검찰이나 언론, 시민단체, 정치권으로부터 법원이나 판사가 비난·비판을 받는 것을 사전에 예방하거나 그에 대해 적절히 대처하는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정치권 등 외부의 공격을 사전에 막으려고 한 것이지 재판개입은 아니라는 주장이다. 그로부터 5개월 뒤 자신이 녹음했던 대법원장의 설득 논리와 똑 닮았다.

사달은 민주당의 뒤늦은 탄핵 추진이 현실화하면서 시작됐다. 임 부장판사는 배신감을 느꼈을 것이다. 더 심한 사법농단을 한 판사도 개업해 잘사는데 왜 하필 자신인지 받아들이기 어려웠을 법하다. 그 결과, 우리는 지금 ‘갈등이 생기면 남보다 못한 게 가족’이라고 하는 말이 딱 들어맞는 상황을 보고 있다.

김두식 경북대 교수는 자신의 책 <불멸의 신성가족>에서 삐뚤어진 가족애로 얽히고설킨 법원과 법조계의 속살을 적나라하게 드러낸 바 있다. 김 교수는 이 신성가족의 틀을 떠받치는 이데올로기로 ‘원만함’을 지목했다. 이쪽저쪽에서 욕먹지 않으려는 처신, 적당한 타협, 우리끼리의 온정주의 등이 바로 그 원만함의 실체다.

김 대법원장은 사법농단이 드러나 사법기득권을 깨부술 절호의 시기에 파격적으로 발탁됐다. 하지만 지난 3년6개월의 시간은 사실 그도 알고 보면 ‘원만한’ 대법원장이라는 점을 입증하는 날들이었다. 시간을 최대한 끌어 여론의 시선이 다른 곳으로 향했을 때 솜방망이 징계로 가족들을 용서했다. 법원행정처를 비롯한 사법행정 개혁은 이렇다 할 결과물이 없다. 어느 쪽에서도 욕먹기 싫어 뜨뜻미지근한 태도와 조처를 반복한 탓이다. 최근 단행된 법관 인사를 두고도 “현 정부 주요 사건을 맡은 재판부를 이례적으로 유임시킨 코드 인사”라는 비판과 “양승태 시절 잘나가던 법관이 요직에 복귀했다”는 상반된 비판이 동시에 나온다. “이것저것 너무 고려한, 장고 끝 악수”라는 한 판사의 촌평이 가볍게 들리지 않는다.

김 교수는 위 책에서 “원만함이라는 이데올로기가 지켜내는 것은 언제나 기득권층의 이익과 기존 질서”라고 짚었다. 요즘 법원 안팎의 상황을 보면 법원 내 기득권과 퇴직 전관, 보수언론의 삼각동맹이 완전히 복원된 듯하다. 중심을 굳게 잡아야 할 대법원장의 원만함이 이런 결과를 낳았다. 신성가족은 불멸하겠지만, 사법부의 미래를 위해서는 서글픈 일이다. 사법개혁, 참 멀고도 어렵다. soulfat@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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