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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크리틱] 비밀과 외국어 / 김영준

등록 2021-02-26 15:43수정 2021-02-27 02:35

김영준ㅣ열린책들 편집이사

중고등학교 시절 영어 참고서에는 영어로 일기를 쓰라는 권유가 머리말에 적혀 있곤 했다. ‘영한사전보다는 한영사전과 친해져야’ 식의 훈계와 함께 말이다. 영어 일기든 한영사전이든 기분에 따라 선택하는 무슨 밥집 메뉴인 듯 쓴 것을 보고 있으면 답답한 기분이 들었다. 내가 어려운 처지일수록 한가한 소리를 더 자주 듣게 되는 패턴을 그때도 만난 것이었다. 그런 충고를 기각할 이유야 많았지만 이런 문제도 있었다. 쓰면서도 무슨 말인지 모를 텐데 나중에 알아볼 수 있나? 그건 일기가 아니라 암호잖아? 물론 일기 쓰기와 암호가 서로 낯선 사이는 아니다.

외국어로 쓰는 것은 일기 쓰기의 유구한 전통 가운데 하나이다. 17세기 영국의 새뮤얼 피프스는 비밀 유지를 위해 속기로 일기를 썼지만 본인의 애정사와 관련한 서술에서는 그 정도론 안심이 안 되었는지 이탈리아어와 프랑스어를 섞어서 썼다. 50년 넘게 계속된 윤치호의 영어 일기는 시작이 미국 유학 시절인 것을 보면 남이 못 보게 하는 것이 애초의 동기는 아니었을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귀국한 뒤에는 영어가 귀찮은 접근을 차단하는 유용한 도구가 되었다. 말년까지 일본어로 일기나 단상을 적곤 했던 김수영의 경우는 보안이 동기는 아니었을 듯하다. 당시에는 일본어 해독자가 많았다. 그가 타계한 직후에는 일본어 유고가 잡지에 번역 없이 게재되기도 했을 정도이니 말이다. 아마 그는 그날 기분에 따라 한국어나 일본어를 선택했던 것 같다.

그러나 일기든 뭐든 정말 보안이 중요하다면 제1 또는 제2 외국어 정도로 안심할 수는 없는 일. 그 바깥의 외국어군에 눈을 돌릴 필요가 있는데, 드미트리 쇼스타코비치 회고록에 등장하는 이반 솔레르틴스키라는 인물이 좋은 예이다. “그는 위대한 학자로 스무개 이상의 언어와 수십개의 방언을 알고 있었다. 그는 감시의 눈이 싫어서 일기를 중세 포르투갈어로 썼다.” 젊은 날의 쇼스타코비치에게 큰 영향을 준 이 걸출한 학자는 독소 전쟁 중 사망했다.

얼마 전 정부 문서에 핀란드어가 등장하여 화제가 되었다. 현실의 핀란드와는 상관이 없고, 특정 폴더 이름으로 ‘북쪽’이라는 뜻의 핀란드어를 갖다 썼다 한다. 핀란드라는 선택은 오묘한 느낌을 준다. 강대국이 인접국을 양처럼 길들이는 것을 뜻하는 혐오스러운 단어 ‘핀란드화’도 생각나고, 핀란드인들이 결사적인 저항으로 러시아인들에게 굴욕을 준 ‘겨울 전쟁’도 떠오른다. 필자와 같은 세대에게는 페테르부르크에 있는 ‘핀란드역’과 그것을 제목으로 쓴 책이 떠오르는 것도 어쩔 수 없다. 그런데 문서 작성자가 의도하지 않았을 이런 역사적 정치적 맥락은 논외로 하고, 왜 하필 핀란드어일까 생각하니 애초에 선택의 여지가 많지 않았을 것 같기도 하다. 영어나 제2 외국어들을 일단 제외하고 나면, 유럽 언어로 ‘북’은 노르웨이어부터 이탈리아어까지 ‘nord’와 비슷한 꼴을 벗어나기 힘든데 이건 누가 봐도 뜻이 짐작이 되는 것이다. 러시아어로는 ‘sever’라 많이 다르지만 이건 또 영어로 오해하면 ‘끊는다, 잘라 버린다’는 뜻이니 취지에 맞지 않는다. 그래서 비유럽 어족인 핀란드어가 자연스레 떠오르게 된 모양이다. 물론 중앙아시아나 아프리카의 언어들도 차례를 기다리고 있을지 모른다.

구글 번역기로 그 핀란드 단어를 찾는 데는 0.1초도 걸리지 않는다. 그걸 다시 한국어로 번역할 때도 0.1초가 걸리지 않는다. 그게 핀란드어인지 몰라도 된다. 의도는 모르지만 결과만 놓고 보면 이걸로 보안을 꾀하기에는 수고가 부족해 보인다. 외국어가 정보의 방화벽 구실을 하던 시절은 빠르게 사라지는 중이다. 이번 논란의 진정한 승자는 구글 번역기인 모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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