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겨레 댓글난의 존재 이유는 무엇인가? 혐오·차별에 반대하는 기사 턱밑에 혐오세력의 놀이터를 만들 것인가? 먼저 혐오의 언어를 걸러내라. 그것이 이은용, 김기홍, 변희수의 죽음에 언론이 할 수 있는, 또 해야 할 의미 있는 추모다.
김민정 | 한국외대 미디어커뮤니케이션학부 교수
인권활동가이자 음악교사였던 김기홍이 세상을 등지며 남긴 한마디는 이랬다. “너무 지쳤어요. 삶도, 겪는 혐오도, 나를 향한 미움도.” 이은용 작가(<우리는 농담이(아니)야>)와 변희수 하사 사망 비보도 전해졌다. 하나의 우주가 존재하기를 멈추는 이유를 섣불리 추정할 수는 없다. 다만 세 사람은 모두 성소수자였고, 남들처럼 평범한 삶을 원했고, 공개적으로 목소리를 냈으며, 수많은 차별과 혐오에 고스란히 노출되어 있었다.
추모의 마음이 모였다. 사회적 타살이라고 했다. 힘이 되어주지 못해 미안하다고 했고 그들이 겪었을 차별과 혐오에 무관심했음을 반성한다고 했다. 그리고 언제나 그랬듯이 시간이 흐르며 기억은 조금씩 옅어지고 일상은 무서운 관성으로 회복된다. 그들의 죽음이 사건사고가 아니라 우리 공동체의 구조적 문제라면 더는 되풀이되지 않도록 해야 할 것이다. 언론은 무엇을 해야 할까. 한겨레는 무엇을 할 수 있을까.
한겨레는 혐오·차별에 명확히 반대해왔다. “차별금지법은 함께살기법”이라는 기획 연재도 1년 전에 시작했고, 포괄적 차별금지법 제정을 촉구하는 사설도 냈다. 트랜스젠더 작가의 칼럼도 격주로 한겨레에서 접할 수 있다. 그것만으로는 부족하다. 최근 발간된 <트랜스젠더 혐오차별 실태조사> 보고서를 보면, 지난 12개월 동안 인터넷에서 트랜스젠더 혐오표현을 접한 경험이 있다는 응답이 97.1%였다. 성소수자들이 공격받는 주요 경로는 댓글이다. 한겨레의 명확한 입장을 담은 기사와는 정반대로, 댓글난에선 혐오의 언어가 넘쳐난다. 표현이 독할수록 주목도는 높아진다. 작은 말들도 모이면 공격의 대상에게 가해지는 위력은 배가 된다. 내가 공격받지 않아도 혐오의 말들을 내뱉는 이들을 보며 타인에 대한 신뢰, 공동체가 지향하는 가치에 대한 믿음이 무너진다. 한겨레는 이 상황을 방치할 것인가?
<뉴욕 타임스>의 독자 댓글 정책을 보자. 표현의 자유를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나라의 대표 일간지는 자사 기사에 달리는 댓글을 즉시, 자동 노출하지 않는다. ‘댓글 관리자(moderator)’가 승인한 댓글만 공개한다. 댓글 관리자가 검토할 수 있는 댓글 양에 한계가 있으므로, 독자들이 댓글을 남길 수 있는 시간은 기사 하나당 24시간이다. 기사 내용 비판은 환영하지만 기자 개인을 공격하는 말은 허용하지 않으며 댓글 관리 정책에 대한 왈가왈부도 사양한다고 밝히고 있다. 댓글난은 뉴스 품질을 향상하는 데 도움이 되는 견해를 교환하는 공간이며, 이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는 댓글 선별작업이 필요하다는 거다. 한겨레 댓글난의 존재 이유는 무엇인가? 어떤 공간으로 가꿔 나갈 것인가? 혐오·차별에 반대하는 기사 턱밑에 혐오세력의 놀이터를 만들 것인가?
표현의 자유는 어떻게 하느냐고? 헌법재판소가 2019년 11월에 이미 방향을 제시했다. 재판관 만장일치로, “차별적 언사나 행동, 혐오적 표현 등을 통해 다른 사람의 인권을 침해하여서는 아니 된다”고 정한 서울시 학생인권조례 규정이 표현의 자유를 침해하지 않는다고 결정했다. 이유도 나와 있다. (1)차별적·혐오적 표현은 단순히 부정적인 의견이 아니라 그 자체로 소수자의 존엄성을 침해해 회복되기 어려운 피해를 남기는 표현이고, (2)다른 사회 구성원에게도 소수자에 대한 적대감을 유발시켜 특정 집단의 가치를 부정하는 결과를 낳기 때문에 (3)인간의 존엄성을 보장하는 헌법의 가치를 실현하기 위해서는 그런 표현을 금지하는 것이 꼭 필요하고 중요하다고 했다. 혐오표현 규제는 자유로운 토론과 성숙한 민주주의를 훼손하는 행위가 아니라 오히려 민주주의 의사 형성을 보호하기 위해 필요하다는 것이 재판관 전원의 일치된 견해다(2017헌마1356).
모든 국민은 법 앞에 평등하고, 차별받지 아니한다는 헌법 정신을 입법으로 구체화하는 노력이 결실을 맺지 못하고 있다. ‘성적 지향, 성정체성’이 차별금지 사유에 포함되어서는 안 된다는 일부 개신교계의 강한 반발에 정치권이 손 놓고 있기 때문이다. 한 사회의 인권 보장 정도를 가늠하기 위해서는 그 사회에서 가장 취약한 집단을 살펴봐야 한다. 사슬의 강도는 가장 약한 고리에 달려 있다. 지금 한국에서는 성소수자 인권 문제가 그렇다. 한겨레가 먼저 혐오의 언어를 걸러내라. 그것이 이은용, 김기홍, 변희수의 죽음에 언론이 할 수 있는, 또 해야 할 의미 있는 추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