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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김용석의 언어탐방] 레임덕: 사라져야 할 말

등록 2021-03-16 13:07수정 2021-03-17 02:39

야당과 언론은 레임덕이라는 ‘언어의 힘’을 종종 정치적 술수로 사용한다. 이렇게 되면 레임덕은 현상을 분석하는 언어가 아니라, ‘정치적 무기’가 된다. 집권 정부가 레임덕이 되면 손해를 보는 건 국민이다. 레임덕 기간을 길게 잡는 것은 정치인들이 민생과 정쟁 사이에서 어느 쪽에 더 집착하는지를 잘 보여주는 척도다.
일러스트레이션 유아영
일러스트레이션 유아영

김용석 ㅣ 철학자

최근 국제적 동물보호단체인 페타(PETA, 동물을 윤리적으로 대하는 사람들)가 ‘동물에 빗댄 욕설’을 자제해달라고 했다. ‘개××’ 같은 욕설은 “동물을 경시하고 폄하하는 인간우월주의적 태도에 기름을 붓는 격”이므로 “말하기 전에 생각했으면 좋겠다”고 제안했다. 페타에 관한 기사에 ‘그러면 채식만 하고 살라!’는 식의 심술궂은 댓글도 달렸다. 페타가 ‘당장 반드시 그래야만 한다’는 근본주의적 입장에서 의견을 낸 것은 아닐 듯싶은데, 역정을 내거나 조롱할 일 또한 아닌 것 같다. 함께 생각해보자는 뜻으로 받아들이는 게 좋을 것 같다.

함께 살아가는 모든 존재에 대해 넓은 마음을 갖자는 의도는 좋은 것이다. 마치 인류가 같은 종 사이에서도 상대를 무시하고 폄하했던 역사를 반성하기 위해 ‘성인지 감수성’을 고양하려고 노력하는 것처럼 말이다. 굳이 말을 만들어 표현하면 우리와 함께 살아가고 있는 모든 존재(동식물뿐만 아니라 지구 환경을 포함하여)를 위해 ‘공생(共生)인지 감수성’에 관심을 갖는 것 또한 우리 삶에 도움이 된다.

동물의 이름은 욕에만 쓰이는 것이 아니라 인간사를 설명하는 데에도 쓰인다. 정치·경제 현상을 빗대어 말할 때 레임덕(lame duck)이라는 표현을 쓴다. 우리말로 옮기면 ‘절름발이 오리’이다. 이 말에는 동물 폄하뿐만 아니라 장애 비하도 함께 들어 있으니, 들어서 기분 좋은 말은 결코 아니다. 안 쓰면 좋을 말이다.

이 말은 영·미 금융계와 정치계에서 유래한 것이다. 그런데 우리나라에서 훨씬 더 그 사용 빈도가 높은 것 같다. 나아가 남용되는 수준이다. 이 말의 사용 빈도는 국가와 권력에 대한 우리나라 정치인들의 의식과 태도를 가늠해볼 수 있는 척도일지 모른다.

레임덕 용어의 유래는 18세기 런던 증권가에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1761년 호러스 월폴은 주식시장과 연관하여 지인에게 보낸 편지에서 “황소, 곰, 그리고 레임덕이 무엇인지 아십니까?”라고 물었다고 한다. 이는 주가가 오르는 장세를 황소에, 내려가는 장세를 곰에, 주식 투자에 실패해서 채무불이행 상태에 이른 투자자를 절름발이 오리에 비유한 것이었다.

영국 금융계에서 쓰이던 레임덕은 19세기 미국으로 건너가 정치 용어로 활용되었다. 미국 남북전쟁 발발 직전인 1860년 11월6일 대통령 선거에서 에이브러햄 링컨이 당선되었으나 제임스 뷰캐넌 현직 대통령의 임기가 다음해 3월4일까지였기 때문에 4개월 동안이나 국정 혼란이 있었다. 이후 미국 대통령의 레임덕은 거의 대부분 신임 대통령 당선일과 현직 대통령 퇴임일 사이의 문제에서 야기된 것이었다. 그 기간을 특별히 ‘레임덕 기간’(lame duck period)이라고도 불렀다. 경제 대공황 시기였던 1932년에 당선되었던 프랭클린 루스벨트의 경우도 마찬가지였다. 이를 계기로 미국 의회는 1933년 수정헌법을 제정해, 11월 선거 이후 퇴임할 대통령이 다음해 3월4일까지 재직하도록 되어 있는 규정을 1월20일로 앞당겨 레임덕 기간을 단축했다.

이처럼 미국에서는 레임덕이라는 용어와 개념이 제한적으로 사용되며 우리처럼 심각히 남용되지 않는다. 결국 정권 인수인계 기간이 레임덕 기간인 셈이다. 그래서 레임덕이란 말을 유머로 활용하기도 한다. 버락 오바마 전 대통령은 계속되는 청중의 환호와 박수로 퇴임 연설을 시작할 수 없게 되자, 그만하라고 했다. 하지만 계속되자 “여러분이 제 말을 안 듣는 걸 보니, 제가 레임덕인 것만은 틀림없는 것 같습니다”라고 유쾌한 농담을 했다.

레임덕이라는 말은 영국에서 탄생했지만, 영국 정계를 대상으로는 거의 쓰이지 않는다. 실제로 분명한 레임덕 현상도 없다. 이는 내각책임제의 특성이기도 한데, 총선에서 승리한 정당의 대표는 선거 직후 바로 총리로서 내각을 구성할 수 있기 때문이다. 복수의 정당이 연립내각을 구성할 필요가 있을 때는 새 정부의 일정이 지연될 수 있지만, 이때도 퇴임할 총리가 새 정부가 들어설 때까지 ‘관리 총리’(caretaker prime minister) 역할을 충실히 한다.

그런데 우리나라에서는 대통령 임기가 반쯤만 돼도 레임덕이라는 말로 집권 정부를 비판한다. 레임덕을 ‘임기 말 현상’이라고 풀어 쓰기도 하는데, 이는 우리 현실을 반영하지 못하는 것이다. ‘권력 누수 현상’이라고도 하는데, 이는 정치가 지나치게 대통령의 권력에 초점을 맞추고 있음을 잘 보여준다. 혹자는 우리나라 정치에서는 권력자 주변부에서 사건, 사고가 시도 때도 없이 일어나기 때문에 레임덕 현상이 상시적이라고 한다. 그런 측면도 있다. 하지만 정치권에서 이 용어를 남발해온 것도 사실이다.

‘레임덕 프레임’은 야권이 집권 정부를 흔들기 위해 사용하는데, 정권이 바뀌면 여야만 바뀔 뿐 레임덕의 틀을 씌우려는 시도는 줄기차게 이어진다. 야당과 언론은 레임덕이라는 ‘언어의 힘’을 종종 정치적 술수로 사용한다. 이렇게 되면 레임덕은 현상을 분석하는 언어가 아니라, ‘정치적 무기’가 된다. 집권 정부가 레임덕이 되면 손해를 보는 건 국민이다. 레임덕 기간을 길게 잡는 것은 정치인들이 민생과 정쟁 사이에서 어느 쪽에 더 집착하는지를 잘 보여주는 척도다.

레임덕은 21세기 정치에 별 도움이 되지 않는 용어다. 무엇보다도 우리는 다양하고 복합적인 변화가 일상이 된 시대에 살고 있기 때문이다. 국정 책임자의 임기 말 1년 동안에도 수많은 일이 일어나고 이에 대처해야 한다. 변화에 따른 다양한 정책을 입안하고 실행해야 한다. 각종 재해와 전염병 같은 ‘돌발 사태’도 예외적이지 않고 일상적이 되었음을 우리는 지금도 실감하고 있다.

또한 오늘날 국가 정책의 상당 부분은 ‘미래 세대의 삶’을 위한 것이다. 전지구적 기후 변화에 따른 환경정책, 육아와 공공교육을 비롯한 각종 복지정책 등이 그 대표적인 예이다. 지속가능한 정책을 입안하는 것은 미래 세대와 ‘통시적 사회계약’을 맺는 것과 같다. 구시대의 사회계약이 동시대 사람들 사이의 공시적인 것에 초점을 맞추었다면 지금은 더욱 미래 세대를 계약 상대로 가정해야 한다. 따라서 어떤 공적 결정을 내리든 미래를 현재의 기획에 참여시켜야 한다. 곧 통시적 사회계약이어야 한다. 정부의 임기 말은 이런 정책에 전념하기 위해서도 적극적으로 활용되어야 한다.

우리는 언어가 의식을 조정할 수 있음을 간과한다. 언어가 바뀌면 생각도 바뀌고 행동도 바뀐다. 언급했듯이 레임덕은 ‘공생인지 감수성이 떨어지는 언어’다. 함께 잘 사는 나라가 정치의 목표라면 그 언어를 내려놓아서 손해 볼 일은 없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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