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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편집국에서] ‘100000’은 얼마나 큰 수일까 / 최우성

등록 2021-03-24 16:24수정 2021-03-25 02:41

문재인 대통령이 25일 오후 경기 고양시 일산 킨텍스에서 열린 ‘한국판 뉴딜 대한민국 인공지능을 만나다’ 행사에 참석해 발언하고 있다. 연합뉴스
문재인 대통령이 25일 오후 경기 고양시 일산 킨텍스에서 열린 ‘한국판 뉴딜 대한민국 인공지능을 만나다’ 행사에 참석해 발언하고 있다. 연합뉴스

최우성 ㅣ 산업부장

영천·보령·공주·정읍·밀양·영주·상주….

그다지 연관성이 없어 보이는 이들 도시의 공통점을 꼽으라면? 전형적인 도농복합도시에 가깝다는 사실 외에도, 10만명 남짓한 인구의 기초자치단체라는 게 공통분모다. 다른 예를 하나 더. 서울 시내에서 하루 지하철을 이용하는 승객 수가 어림잡아 750만명이라고 하니, 단순 셈법으론 20분 동안의 연이용 승객 수가 10만명이란 얘기도 된다.

엉뚱하게도, 우리 일상의 이런저런 숫자를 느닷없이 따져보기 시작한 건 각종 뉴스나 공적 담론에 유독 ‘10만명’이란 숫자가 마치 오랜 단골손님처럼 예고 없이 등장한다는 묘한(!) 느낌이 어느 순간 들면서부터다. 한 예로, 지난 연말 문재인 대통령은 ‘한국판 뉴딜, 대한민국 인공지능을 말하다’를 주제로 내건 행사에서 한국판 뉴딜의 성공을 위해 인공지능(AI) 인재 10만명을 양성하겠다는 계획을 밝혔다. 하필 ‘왜’ 10만명? 달리 근거나 배경 설명은 없었다. 2000년대 초반까지 기억을 거슬러 올라가면 중국 전문가 10만명을 키우자던 시절의 기억도 떠오른다. 지난해 세상을 떠난 이건희 삼성전자 회장은 2002년 여름 삼성그룹 인재전략 사장단 워크숍에서 “21세기는 1명의 천재가 10만명을 먹여 살리는 인재경영의 시대”라는 말을 남긴 것으로 유명하다. 역시나 ‘그냥’ 10만명이다. 정치인들이 무시로 내뱉는 언사 속에도 10만이란 숫자가 불쑥 끼어들 때가 많다. 딱히 그럴싸한, 혹은 그래야만 할 근거나 이유가 없는데도. 한국인의 머릿속에 각인된 10만이란 숫자의 ‘원형’은 조선시대 ‘10만 양병설’의 회한과 관련된 걸까? 하지만 학자들은 16세기 조선의 인구가 1천만명을 조금 넘었다고 추정하는 터라, 당시 기준 10만명은 현재와는 분명 거리감이 있다.

엉뚱한 생각이 꼬리를 물다 보니 결국 ‘크리티컬 매스’(critical mass)란 개념을 떠올리는 데까지 이르고 말았다. 애초 물리학 분야에서 등장한 용어로, 연쇄반응을 일으키는 데 필요한 핵물질의 최소질량이란 의미다. 우리말로 임계질량이라 옮겨 부르기도 하는 이 말은 어느새 자연세계를 떠나 인간세계로 옮겨져 사회의 동태적 변화를 설명하는 도구로 쓰임새가 확장됐다. 의미 있는 질적 변화를 불러오는 최소한의 머릿수 정도라고나 할까. 마케팅이나 사회운동 분석에 활용된 건 자연스러운 수순이다. 예컨대 영화나 음악(음원) 같은 문화콘텐츠 상품의 경우, 제품 출시 초기 한동안은 일부 소비자의 관심에 머물다가 어느 순간 대중적으로 인기가 폭발하는 경우가 꽤 많다. 결국 상품(사회운동)의 성패는 어느 정도의 머릿수가 크리티컬 매스이냐, 또 크리티컬 매스에 얼마나 빨리 도달하느냐에 달렸다.

자연스레 10만이란 숫자는 대체 얼마나 큰 수일까 궁금해졌다. 크리티컬 매스의 값어치를 할 만할까? 10만명이라면 우리나라 인구 5천만명의 0.2%에 해당할 터. 500명당 1명꼴인 셈이다. 당장 주변에서 500명 크기의 집단을 떠올려보라. 그중의 1명, 즉 우리나라 전체로는 10만명의 대략적인 윤곽이 그려질 것이다.

물론 숫자가 모든 걸 설명한다지만 숫자만으론 아무것도 설명하지 못할 때도 많다. 지난해 종합부동산세 납부자는 약 75만명, 인구의 1.5%다. 이 숫자를 ‘겨우’라 여기면서도 정작 10만명이면 세상을 바꾼다고 외치는 경우도 흔하다. 2016년 11월5일 2차 촛불집회 참가자는 주최 쪽 추산 20만명, 경찰 추산 4만8천명이었다. 얼추 10만명이라 치자. 일주일 뒤 머릿수는 106만명으로 순식간에 불어나며 기어이 세상을 바꿔냈다. 당연한 얘기겠지만, 크리티컬 매스는 어디까지나 상대적이고 사후적이다.

코로나가 덮친 세상은 이제 한 단계를 다시 넘어섰다. 25일 0시 기준으로 발표될 우리나라 확진자 수는 10만명을 넘을 게 확실하다. 아마도 이 글을 쓰고 있는 이 순간, 이미 확진자 수 여섯자리 시대가 시작됐을 거다. 바이러스와의 지난한 싸움에서만큼은 10만명이란 저 낯익은 숫자가 절대 크리티컬 매스가 되어서는 안 되리라. 한가지 더 바람이 있다면 정치 언어와 정책 담론에 10만명 따위의 판에 박힌, 맥락 없는 숫자 내지르기 행태는 부디 사라졌으면 한다. 다소 밋밋하더라도 탄탄한 근거와 차분한 논리가 필요한 때다. 엉뚱한 생각에서 출발한 빈약한 결론일지언정.

morge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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